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 (3.1 명동사건)

산풀내음 2016. 12. 27. 22:29

19763 1,

3.1. 민주구국선언 (3.1 명동사건)

 

1975 5 13일 발효된 긴급조치 9호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반유신운동은 1976 1 23일 원주선언으로 되살아났다. 당시 원주 원동성당에서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천주교 신부들과 함께 개신교의 문익환 목사, 함석헌 등이 서명한 반유신선언을 채택했다. 이에 기도회에 참석한 개신교 신자들도 오는 3.1절에 같은 취지의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

 

한편 김대중, 정일형 의원 등 정치권에서 3.1절에 즈음한 시국선언을 모색하였다. 또한 정치권과 종교계 모두 윤보선의 참여를 희망하였고 결국 윤보선을 중심으로 시국선언이 준비되었다. 양측의 흐름을 하나로 모아 실질적으로 일을 추진한 것은 문익환 목사였다.

 

고 문익환 목사

 

3.1민주구국선언은 개신교 쪽이 주도했지만 발표 장소는 명동성당으로 정해졌다. 3.1 57주년을 맞는 1976 3 1 700여명의 신자들이 모인 명동성당에서 전날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재야인사이자 전 서울여대 교수인 이우정이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정일형 등 11명이 서명한 ‘3.1 민주구국성명을 낭독하였다. 유신철폐, 긴급조치 철폐, 의회정치 회복, 사법권 독립, 박정희 사퇴 등이 담겨 있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조용히 끝이 났다.

 


 

그러나 다음 날 국무회의 석상에서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을 당장 구속할 것을 지시했고 관련자들이 하나 둘 구속되더니 3 10일 검찰은 일부 재야인사들이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했다고 발표한다.

 

이 사건으로 서명자와 기타 관련자 20여명이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입건돼 그 중 11명은 구속, 정일형 의원을 포함한 9명은 불구속 기소됐다. 정일형 의원은 이후 대법원에서 유죄확정판결을 받음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현직의원이 임기 중에 법원의 유죄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경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1구국선언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남편의 수인번호를 달고 하얀 우산과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입고 시위하는 장면.

3.1구국선언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남편의 수인번호를 달고 하얀 우산과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입고 시위하는 장면.

1976 5 4일 ‘3·1구국민주선언’ 사건 1회 공판정인 대법정 밖 연좌시위 모습.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왼쪽)의 모습도 보인다. 입술의 십자 표시는 민주주의의 고난과 언론의 자유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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