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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 선언 및 내전의 시작

산풀내음 2016. 12. 29. 21:48

19923 3,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 선언 및 내전의 시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Bosna Hercegovina)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3일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 선포했다. 한편 공화국 선거관리위원회 관리는 이날 229, 31일 양일간 있었던 공화국 주민투표의 공식집계결과 총 유권자의 63.4%가 투표에 참가, 그 중 99.34%가 독립에 찬성했다고 밝혔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Alija Izetbegovic, 1925-2003)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이 같은 투표결과에 언급, “보스니아는 독립국이다. 보스니아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주권국이 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독립을 반대해 사라예보 일원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세르비아 민병대를 비난했다. 한편 공화국 내무장관은 사라예보에서 독립에 반대하는 세르비아인들과 독립에 찬성하는 시민들 사이의 유혈 충돌로 5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Alija Izetbegovic, 1925-2003)

 

1991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연방 탈퇴로 시작된 유고 연방 내 공화국들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보스니아에서도 연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는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계,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의 세 민족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같은 이유로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에도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찬성했던데 반해 세르비아계는 반대하면서 갈등은 격화되었다.

 

결국 1992 2월 유고 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2/3를 차지하는 보스니아계(오늘날은 세르비아계의 비율이 1/3을 조금 넘음)와 크로아티아계가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나머지 1/3의 세르비아계가 독립에 반발, 이웃한 신 유고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하에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이름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간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일단 내전은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가 함께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구조였으나 여기에 크로아티아에서 같은 해 6 12일 작게는 크로아티아계 공화국 지역, 크게는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목표로 전쟁에 참전하면서 상황은 더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보스니아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은 다른 민족에 대한 인종 청소로 잔악의 정점을 이루었고, 자연스럽게 방화, 살상, 강간 등이 자행되어 그 잔악성이 국제사회를 경악시켰다. 특히 처음부터 전쟁을 인종청소의 기회를 삼았던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지역에 정규군보다는 민병대와 의용병을 적극 투입했고, 그나마 군법의 최소한의 규제조차도 받지 않는 무장병들이 전장에서 날뛰면서 약탈, 강간, 학살이 빈번하게 벌어지게 된다. 강간공장을 만들어서 학교, 교회 등에 가임기 여성으로 판단되는 무슬림 여성(10~60세 사이)을 한 곳에 몰아두고 집단 강간을 해서 혼혈 아기를 임신시켰다. 보스니아계의 무슬림 남성을 학살로 제거하고, 여성들의 밭에 씨를 뿌려 세르비아계의 아이를 갖게 함과 순수한 핏줄을 더럽히는 동시에 무슬림 여성을 성노예로 만들어 종교적 신앙까지 파괴하는 최악의 전쟁범죄를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실시했다.  

 

보스니아 특수 부대원이 건물 옥상등지에 숨어있는 세르비아족 저격수에게 응사하는 장면


A picture that shocked the world prisoners were kept in horrific conditions while many bosnian men were slaughtered without mercy

 

특히 1995 7월에 일어난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Genocide of Srebrenica) 당시 그 잔악성은 극에 달했다. 내전 중에 터진 사건으로 보스니아 레르체고비나의 스레브레니차 지역에 살고 있던 약 30,000여명의 보스니아인들이 라트코 므라디치 장군 휘하의 스르프스카 공화국 군대에 의해 인종 청소를 당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자료에 따르면 굴삭기로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수많은 무슬림 남성들을 죽인 뒤 묻어버렸는데 이러한 구덩이들이 너무 많은데다가 그 위치도 정확하지 않아 수치가 정확히 계산되지 않을 정도이다.

 


인종 및 종교 대청소란 목적하에 학살당하는 무슬림 주민들. 스브레니차 지역에서만 최소 8000여명이 학살당했고, 보스니아 내전 기간 동안 총 25만 명이 목숨을 잃음.

 

인종 대청소 당시 매장당한 무슬림 주민들의 유골 발굴 장면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혐의로 체포된 보스니아 내전의 주범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c)

 

전쟁이 시작되자 1992부터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의 NATO 가입국을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신 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단계적 징벌이 내려졌다. 신 유고 연방에는 경제 재제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심지어 국제연합에서도 신 유고 연방의 회원국 자격을 사실상 박탈하면서 사실상 국제사회로부터 왕따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 변화와는 별개로, 당시 서방세계 국가들이 펼친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재제와 금수조치는 별 효과가 없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세르비아와 인접한 주변 동유럽 국가들이 세르비아와 밀수, 밀거래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 평화유지군까지 파견되었으나 평화유지군은 현장관리만 맡는 군대였으니 세르비아계 입장에서 보면 직접 공격만 안 하면 상관없으므로 내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95년 평화로운 일요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번화가 시장에 대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포격으로 다수의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한 사건으로 국제적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다. 사라예보는 당시 양측의 경계였고, 전쟁 중 우세한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 포위되어 있었으나 수도 등의 이유로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이것이 깨지게 된 것.

 

이런 여론을 뒤에 업고 UN이 아닌 NATO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으로 명명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면공습을 개시했다. 8월경에 시작된 NATO 소속 공군기들의 대대적 폭격은 수도 사라예보 일대에 배치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야포 진지와 물자 보관소, 통신시설을 집중 폭격했고,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핵심시설도 덩달아 폭격 대상이 됐다. 정작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다고 하나 NATO가 완전히 세르비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가 천명된 것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사실이었고 이에 세르비아계는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때맞춰 이웃 크로아티아 공화국 영내에서는 미국의 후원으로 재정비된 크로아티아 공화국군의 '폭풍(Storm)' 작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크로아티아군은 여전히 형편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적도 세르비아 정부군이 전면 개입을 꺼리는 상황에서 주로 크라이나 공화국군과 의용병들만으로 구성되어 전력면에서 나을 게 없었던 데다 보스니아에 너무 깊게 빠져든 나머지 크로아티아 전선에 상대적으로 소홀해졌기 때문으로,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점령하고 있던 세르비아계 크라이나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나머지 세르비아계 잔존세력이 본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어 미국의 특사가 세르비아를 후원하던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을 방문해 압력을 넣으면서 전쟁은 수습단계로 들어섰다. 옐친은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후원하지 말도록 경고했고, (후에 학살 전범으로 역사에 남게 되는)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도자에게 더 이상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회담에 응하라고 설득할 수박에 없었다.

 

결국 1995 12월 14,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역사적인 데이튼 협정(Dayton Accord or General Framework Agreement for Peace in Bosnia and Herzegovina)이 체결되었다. 다만 독립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을 인정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각기 영토의 5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무슬림 연합이 공존하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직은 세 민족(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가 번갈아 맡게 된다는 협정의 내용은 결국 갈등의 근본원인인 민족문제를 제거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후 1996 3월부터 사라예보에서 스르프스카(세르비아계) 공화국군이 철수하였다.

 

Seated from left to right: Slobodan Milošević, Alija Izetbegović, Franjo Tuđmaninitialling the Dayton Peace Accords at the Wright-Patterson Air Force Base on 21 November 1995.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로 동쪽 및 남동쪽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북쪽과 서쪽은 크로아티아와 접한다. 이 나라는 거의 내륙국에 가까운데, 해안선의 길이는 21km에 불과하다. 국토 내륙에서 중앙과 남부는 산지이고, 북서부는 구릉지이며, 북동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내륙 지방의 상당 부분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눈이 많이 내리는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국토 남단 끝 지역은 평야 지대로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소위 '구성 민족'이라 불리는 3대 민족 집단이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은 보스니아인(인구의 48%)이며, 두 번째는 세르비아인(37%), 세 번째는 크로아티아인(14%)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민족보다는 지명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중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국토의 51%)과 세르비아인 중심의 스릅스카 공화국(48.5%)으로 사실상 갈라져 있다. 다만, 브르치코 행정구는 양측 모두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