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5일

30년간 소련을 지배한 스탈린 사망

산풀내음 2016. 12. 31. 07:51

19533 5,

30년간 소련을 지배한 스탈린 사망

 

스탈린 소련 수상이 1953 3 5 73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했다. 30년 동안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지도자로 군림해 온 스탈린의 죽음은 다음날 오전 6시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됐다. 눈 덮인 모스크바 모든 건물에는 검은 띠를 두른 반기가 게양됐다. 유해가 안치된 노동조합회관에는 애도행렬이 줄을 이었고 유해는 시민이 바친 꽃과 화환으로 덮였다.

 

 

 

 

 

 

 

스탈린 장례식

 

스탈린의 죽음에는 미스터리가 많다. 특히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가 스탈린의 죽음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통상적으로 받아 들여진다. 당시 스탈린은 공안기관을 장악한 베리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베리아가 너무 강해져 그 자신도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다.

 

 

 

스탈린의 딸, 나디아를 안고 있는 베리야, 맨 뒤가 스탈린

 

2 28일 스탈린은 측근들과 함께 크렘린 궁에서 영화를 보았고 그 뒤 근처 별장으로 옮겨 새벽까지 마셨다. 그 자리엔 베리아, 말렌코프, 불가닌, 흐루시초프가 있었다.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날 스탈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3 1일 오전 내내 인기척이 없다가 오후 6 30분쯤 방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도 인기척이 없어 경호원이 어쩔 수 없이 10시쯤 방문을 여니 스탈린은 침대 밑에서 떨어진 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부서진 시계는 6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호원은 국가안전부 장관이 말렌코프에게 보고를 하였지만 말레코프는 베라아에게로 책임을 넘겼다. 베리아는 당시 여자들과 술 파티 중이었는데 경호원들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하고는 곧 별장에 도착했다. 별장에 도착한 베리아는 스탈린 동지가 잘자고 있으니 잠을 방해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의사는 부르지 않았다.

 

의사가 온 것은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3 1일 오후 630분을 기준으로 하여 12시간 뒤였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사실상 방치되었다. 베리아는 나중에 "내가 그를 처치하였어. 내가 당신들 모두를 살린 거야"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9 12월 21 ~ 1953 3월 5)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2~53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1941~53년 소련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냈다. 그는 4반세기 동안 소련을 독재적으로 통치하면서 세계 주요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1911년 당시 스탈린

 

스탈린은 소련을 공업화하고,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했으며, 철저한 경찰 테러에 의해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41~45년에 독일을 패배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소련의 지배권을 동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대했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최고 설계자이며 능숙하기는 하지만 가공할 정도로 무자비한 조직가였던 스탈린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고 생활수준을 궁핍하게 만든 반면 강력한 군산복합체를 이룩해 소련을 핵 시대로 이끌었다.

 

스탈린의 일대기는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소비에트식의 '전설'로 인해 오랫동안 은폐되어왔다. '전설'은 영웅적인 볼셰비키 혁명의 모의자이자 소련의 건국자인 레닌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그의 위대성을 과장하고 있다. 전성기에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 불리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들을 많이 건립해 개인 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전대 미문의 광신적인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그가 사망한지 3년이 지난 1956 2월 제20차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스탈린과 흐루시초프

 

Hungarians witness the fallen statue of communist leader Josef Stalin in front of the National Theater in Budapest on Oct. 24, 1956. (AP Photo/Arpad Hazafi)

 

 

스탈린, 왜 마오쩌둥 똥을 몰래 가져갔나 한겨레 2016. 1. 19

 

https://www.youtube.com/watch?v=1M_1CdCcH0M&t=86s

 

 

국가 정상들의 해외 방문 때 상대국 정보당국이 정상의 건강상태를 염탐하기 위해 분변까지 수거한다는 항간의 소문이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던 듯하다. 적어도 스탈린 시절 소련은 이같은비밀 채변 작전을 펼쳤다는 주장이 나왔다.

 

1940년대 소련 스탈린의 비밀경찰이 마오쩌둥 등 외국 지도자들의 배설물을 채취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러시아 언론을 인용해 27일 보도했다. 방송은 전직 소련 스파이였던 이고르 아타마넨코가 러시아 첩보기관 자료를 연구하던 중 이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아타마넨코는 소련 정보당국이 1949 12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비밀 화장실을 설치해, 마오의 배설물이 하수구로 흘러내려가지 않고비밀 상자로 수집됐다고 주장했다. 방문 기간 동안 마오의 분변은 꾸준히 모니터 됐으며, 스탈린은 이를 당시 진행된 협상에서 주요 자료로 참고했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 쪽이 배설물에서 얻어낸 자료는 마오의 감정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는 게 아타마넨코의 설명이다. 그는예컨대 배설물에서 트립토판 수치가 높으면, 소련 쪽은 그가 침착해서 다가설 수 있는 상태라고 판단했다. 반면, 칼륨이 부족하면 긴장해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는당시 소련엔 지금 정보당국들이 쓰는 도청 도구들이 없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어떤 인물에 대한 정보를 빼내기 위해 과도한 노력을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마오쩌둥은 국-공 내전을 마무리 짓고 앞서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한 뒤 의기양양하게 모스크바 방문길에 올랐지만, 스탈린으로부터 크게 얻어간 것이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 오히려 모욕적인 대접을 받았다. 마오가 도착한 역에선 제대로 된 환영행사도 없었고, 환영 리셉션도 크레믈이 아닌 시내 호텔에서 열렸다. 스탈린이 만나줄 때까지 며칠 동안 소련 쪽 인사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오는평등한 관계를 요구했지만, 스탈린의 철저한길들이기가 이어졌다.

소련 쪽이 숙소를 도청하고 있다고 확신한 마오는 벽에 대고, “나는 먹고 싸는 것만 하러 온 게 아니오!”라고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마오가배설물도 결국 스탈린의길들이기과정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아타마넨코는 이같은비밀 채변작전이 당시 스탈린의 심복으로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휘 아래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언론들은 스탈린 사망 뒤 집권한 흐루시초프가 이를 폐기했다고 보도했다. <비비시> 방송은 러시아 정보당국을 접촉했으나코멘트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