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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인 김영환 공군 준장, 비행 훈련 중 사망

산풀내음 2016. 12. 31.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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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인 김영환 공군 준장, 비행 훈련 중 사망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역이자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였던 김영환 공군 준장이 1954 3 5 F-51 전투기를 몰고 사천기지에서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악천후 때문에 34세의 일기로 순직했다.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환 장군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은 다름 아닌 공군 초대 총참모장(현 참모총장 격 직책) 김정렬 장군이다. 특히 청년시절 일본 육군 항공대 조종사로 있었던 김정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조종사의 꿈을 동경하며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일본 쓰다누마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조종사의 길을 걸었다.

 

당시에는 일제 식민치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 비행학교에서 조종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만큼 유복한 집안이었다. 쓰다누마 비행학교 졸업 후 김영환은 일본 관서대학 항공과에 진학해 비행공부를 계속했고 1944년 귀국했다. 귀국직후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유복한 환경에서 모자랄 것 없이 자랐지만 일본에 침탈당한 조국 안보에 기여하고자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군사영어학교는 한국에서 장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946 1 15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김영환은 육군 6연대( 6사단의 전신) A중대장으로 보임돼 공군창군 주역 7인 중 가장 먼저 한국군 군복을 입었고, 곧 출중한 영어실력으로 미군정 통위부(현 국방부) 정보국장 대리에 보직됐다. 특히 정보국장 대리직을 수행하면서 얻은 다양한 정보를 통해 어떻게 항공부대 창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이는 후에 한국 국방경비대에 공군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육군과 해군만을 창군했던 미군정청을 설득해 공군을 창설하는 데에 밑거름이 됐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T-6 훈련기로 적 전차와 차량을 폭탄과 수류탄으로 공격, 큰 공을 세웠으며, 한국 공군 최초로 10명의 동료와 함께 F-51전투기를 미 극동 공군으로부터 인수하기도 했다. 1951 10 11일에는 미 제5공군의 단위부대에서 한국 공군 최초로 독립 편대를 이끌고 단독출격을 개시하기도 했다.

 

특히 1951 9 18일 제1전투비행단 전대장(대령)일 때 북한군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해인사 부근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끝내 폭격하지 않아 팔만대장경과 대웅전인 `대적광전` 등 해인사의 숱한 국보급 문화재들을 전화로부터 지켰다.

 

매년 고등비행교육 수료식에는 공군참모총장이 새내기 조종사들 한 명 한 명에게 빨간 마후라를 직접 목에 걸어준다. 실습 및 기본비행교육 과정을 포함해 약 1 8개월에 걸친 길고도 강도 높은 비행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예조종사로 다시 태어난 ‘보라매’들을 공군의 수장이 직접 챙기는 의식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바로 빨간 마후라다.

 

오늘날 공군조종사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빨간 마후라의 효시가 바로 한국전쟁에서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을 이끌었던 김영환 장군이다. 그는 전투기 탑승 때 빨간 머플러를 매고 다녔으며 이것이 널리 유행하게 되면서 공군 조종사의 상징이 됐다.

 

1953 8 15일 휴전 직후 광복절 맞이 조종사환영대회에 참석한 김영환 장군. 10전투비행단장 시절로 당시 그가 즐겨 쓰던 리히트호펜 스타일의 장교모와 빨간 마후라가 눈에 띈다. (사진: 공군)

비행을 마치고 F-51D 머스탱 전투기 위에서 비행일지를 쓰는 김영환 장군 (사진: 공군)

이륙하는 F-51D. 미국의 원조로 근근이 항공전력을 유지하다가 불과 1년여 만인 1951 10월 단독출격을 실시한 것은 대단한 쾌거였다. 김영환 장군은 그러한 역사적 성과의 중심에서 공군을 진두 지휘했다. (사진: 공군)

공군이 빠르게 제트화를 이룩하면서 F-51 머스탱 시대는 빠르게 막을 내렸지만 공군 발전의 초석을 다진 김영환 장군과 F-51 전투기는 불멸의 전설이 됐다. (사진: 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