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5일

남북이산가족 서신교환 시작

산풀내음 2017. 1. 12. 20:05

19463 15,

남북이산가족 서신교환 시작

 

1946 3 15일 아침 640분 개성역. 소련군 특별 군용열차가 38선을 넘어 역 구내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열차에는 소련군 중위 크리켈과 호위병 1, 북한 교통체신부 공무출장소장 이두경과 수행원 2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맞이한 사람들은 전날 밤 서울을 출발한 미군 대위 파이체을과 미군 병사 2, 미 군정청 체신부 우정국 계장 김선유 등 일행 8명이었다. 양측은 사전에 합의한 대로 오전 10시가 돼서야 악수를 나누고 각각 가져온 행낭들을 교환했다. 우편물이 담긴 행낭이었다. 미·소 점령군에 의해 교환이 금지된 지 8개월 만에 남북 우편물이 38선을 넘는 순간이었다.

 

이날 남한에서 보낸 서신은 30229통이었고, 북한에서 온 서신은 15760통이었다. 남북 사이에 서신왕래가 끊긴 것은 한반도가 38선으로 분단된 지 22일만인 1945 9 6일이었다.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은 해주우체국에 지시, 전신과 우편물 등을 남한에 보내지 못하게 하고 남한과의 전화통화도 차단했다. 이날 남쪽에서 보낸 서신은 친인척의 안부를 묻는 사적인 내용이 대부분인데 반해 북에서 온 서신의 상당수는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부추기는 선전물이 주종을 이뤘다.

 

이날의 우편물 교환은 그 해 1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2차부터 교환장소를 개성역에서 개성우체국으로 옮기고 6차부터 매주 1회씩 교환했다. 21차부터는 소련 측의 요구로 인가도 없는 여현역으로 교환 장소를 바꿨다. 그 후에도 10여 차례 일정이 변경되는 곡절을 겪었지만 51차부터는 매주 목요일 여현에서 교환이 이뤄졌다. 그러다가 625전쟁 직전인 1950 6 22 165차 교환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43개월 동안 오간 우편물은 북한행 1922180, 남한행 963751통이었다.

 

그리고 1972 6월 남북 적십자회담 본 회담 의제로 서신교환 문제가 확정된 이후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줄곧 논의돼 왔으나, 그때마다 각종 정치적 문제와 어우러져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2000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 2001 3 15일 서신교환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남북은 2001 3 15일 오후 2시부터 45분여 동안 판문점에서 6.25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들의 애달픈 사연을 담은 서신 600(남북 각 300)을 교환했다. 당시 애틋한 사연들이 방송을 통해 소개됐었다. 북측 이산가족들은 대부분이 남북이 분단된 지 반세기여 만에 처음으로 남측의 혈육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동안 가슴에 맺힌 그리움과 끈끈한 혈육의 정을 구구절절이 담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계속 서신교환을 이어갈 예정이었던 우리에 비해 북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더 이상의 제대로 된 서신교환은 이뤄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