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15일,
남북이산가족 서신교환 시작
1946년 3월 15일 아침 6시40분 개성역. 소련군 특별 군용열차가 38선을 넘어 역 구내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열차에는 소련군 중위 크리켈과 호위병 1명, 북한 교통체신부 공무출장소장 이두경과 수행원 2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맞이한 사람들은 전날 밤 서울을 출발한 미군 대위 파이체을과 미군 병사 2명, 미 군정청 체신부 우정국 계장 김선유 등 일행 8명이었다. 양측은 사전에 합의한 대로 오전 10시가 돼서야 악수를 나누고 각각 가져온 행낭들을 교환했다. 우편물이 담긴 행낭이었다. 미·소 점령군에 의해 교환이 금지된 지 8개월 만에 남북 우편물이 38선을 넘는 순간이었다.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은 해주우체국에 지시, 전신과 우편물 등을 남한에 보내지 못하게 하고 남한과의 전화통화도 차단했다. 이날 남쪽에서 보낸 서신은 친인척의 안부를 묻는 사적인 내용이 대부분인데 반해 북에서 온 서신의 상당수는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부추기는 선전물이 주종을 이뤘다.
이날의 우편물 교환은 그 해 1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2차부터 교환장소를 개성역에서 개성우체국으로 옮기고 6차부터 매주 1회씩 교환했다. 21차부터는 소련 측의 요구로 인가도 없는 여현역으로 교환 장소를 바꿨다. 그 후에도 10여 차례 일정이 변경되는 곡절을 겪었지만 51차부터는 매주 목요일 여현에서 교환이 이뤄졌다. 그러다가 6ㆍ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22일 165차 교환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4년3개월 동안 오간 우편물은 북한행 192만2180통, 남한행 96만3751통이었다.
그리고 1972년 6월 남북 적십자회담 본 회담 의제로 서신교환 문제가 확정된 이후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줄곧 논의돼 왔으나, 그때마다 각종 정치적 문제와 어우러져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 2001년 3월 15일 서신교환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남북은 2001년 3월 15일 오후 2시부터 45분여 동안 판문점에서 6.25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들의 애달픈 사연을 담은 서신 600통(남북 각 300통)을 교환했다. 당시 애틋한 사연들이 방송을 통해 소개됐었다. 북측 이산가족들은 대부분이 남북이 분단된 지 반세기여 만에 처음으로 남측의 혈육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동안 가슴에 맺힌 그리움과 끈끈한 혈육의 정을 구구절절이 담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계속 서신교환을 이어갈 예정이었던 우리에 비해 북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더 이상의 제대로 된 서신교환은 이뤄지지 못했다.
'역사속에 오늘, 3월 > 3월 15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 선출 (0) | 2017.01.12 |
---|---|
고르바초프, 초대 소련 대통령에 취임 (0) | 2017.01.12 |
대한민국 대표 부정,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 (0) | 2017.01.12 |
이란, 석유 국유화 법안 가결 (0) | 2017.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