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5일

대한민국 대표 부정,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

산풀내음 2017. 1. 12. 20:14

19603 15,

대한민국 대표 부정,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

 

1)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당선 및 재선

 

1948 5 10일 드디어 총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는 만 21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하였다. 이후 헌법이 만들어졌는데 이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며 대통령은 국회에 의한 간접 선거로 선출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48.7-52.8)으로 선출되었다. 1948 8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독재 정치를 펼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권력에 빠지게 된다. 그는 재선을 원하였지만 당시 국회에는 이승만 지지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해,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 선출 방식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꿔 조봉암을 누르고 재선(52.8 -56.8)에 성공하였다.

 

2) 3선을 위한 사사오입개헌과 진보당사건

 

임기가 반쯤 됐을 무렵 다시 장기집권에 야욕을 보인 이승만은 3선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시켰기 때문에 3선은 불가피했다. 문제가 발생하자 의회에 이를 맡기기로 하는데 의회에서도 정족수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를 통해 3선을 가능하게 했다(소위 사사오입개헌, 四捨五入改憲).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신익희의 사망으로 조봉암을 또다시 누르고 3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대통령으로는 자유당 후보(이승만)가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으로는 자유당 후보 이기붕이 아닌 민주당 후보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 결과로 인해 자유당 입장에서는 좋을 리 없었다. 한편으로 얼마 뒤 이승만은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법살(法殺)하였다.

 

3) 4선을 위한 조직적 부정선거 준비

 

물론 자유당의 위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기 시작하면서 경제 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서민들의 삶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승만 자신이 장기 집권을 위해 했던 무리한 개헌들은 결국 정치적인 부패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자유당에는 불리한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의 4선은 실패가 유력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58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의석수가 불어나자 자유당은 한 층 더 불리해졌다.

 

이런 불리한 상황 하에서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을 위해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준비한다. 먼저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시, , 면장을 임명제로 바꿔 친자유당 세력으로 구축한다. 이러한 과정과 함께 전당대회를 통해 자유당은 1959 6월에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으로 선출한다. 한편 민주당은 신구파의 갈등으로 우여곡절 끝에 1959 11 26일에야 조병욱을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이처럼 야권의 선거전 전열정비가 내부의 사정으로 인하여 늦어지자, 조기선거실시가 상책이라고 판단한 자유당은 11월부터 본격적인 선거대책을 세우고 부정선거를 사전에 준비해 나갔다. 그리고 1960 1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 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조기선거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으나, 정부는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당초보다 2개월 앞당긴 3 15일을 선거일로 공고하였다.

 

민주당의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1960 2월 25 하와이에서 신병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게 되어 지난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이승만은 대통령 단독후보가 되었다. 참고로 지난 1956년 대선 때에서는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였다.

 

이제 야권의 강력한 대통령 경쟁후보가 없어진 이상, 이승만의 당선은 확정적이 되었으며, 따라서 선거의 초점은 대통령직의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선거로 옮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후보인 이기붕 사이에서 전개되는 양상이 되었으나, 자유당은 당초에 짜놓았던 부정선거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4) 3.15 부정선거

 

선거결과를 미리 분석한 이승만 정권은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계획을 세웠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여당의 야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사건이 연일 계속됐다.

 

선거 1년 전에 내무장관에 임명된 최인규는 대대적인 부정선거의 지침을 각급 기관장에게 극비리에 하달했다. 최인규는 직위를 이용해 각급 기관장의 적극적인 선거개입을 강요하고 대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마련했다. 이러한 음모는 한 말단 경찰관이부정선거 지령서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폭로됐다. 그 내용을 보면 1) 40% 사전 투표, 2) 3인조 또는 5인조에 의한 반공개투표, 3)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 강요, 4) 기권자의 대리 투표, 5)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6) 투표함 바꿔 치기, 7)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8) 발표 조작 등

 

이런 가운데 2월 28일에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된 민주운동이 일어 났으며, 또한 같은 해 3 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선거 당일 새벽, 이승만 정권은 40%나 되는 찬성표를 투표함에 미리 투입해 놓았고, 투표소 안팎으로 무장경찰과 완장부대를 배치했다. 개표 결과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각각 963만 표(89%) 833만 표(79%)의 득표로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장면은 184만 표뿐이었다.

 

사전 40% 투표 등으로 총유권자수보다 투표자수가 많게 되자 범행을 숨기기 위해 투표함을 불사르고 있다.

3.15 선거 모습()과 부정선거 표들()

 

그러나 자유당의 이 같은 선거부정은 315선거 당일부터 시위를 유발했다. 특히 마산은 시위가 심해 오후 6시부터 마산시청 앞에서 시작한 시위가 그날 밤 11시경에야 강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8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유혈사태를 빚었고, 이날 행방불명 됐던 김주열 군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4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가 419혁명과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이루어냈다.

 

4·19혁명 이후 부정선거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이 재판은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으로 이관되었다. 재판 결과, 3·15부정선거 당시의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는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로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관련자들도 실형을 받았으나 그 뒤 감형·특사 등으로 거의 풀려났다.

 




체류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군(당시 마산상고 1학년)은 시신이 4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산학생 시위.

학생들의 시위에 실탄을 장착한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


1961 3.15부정선거 관련 특별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