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고신대(고려신학대학) 학생들인 문부식, 김은숙, 김화석, 박정미 등은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를 방조하고 광주학살을 용인한 것을 비판하면서 부산미문화원에 잠입하여 방화하고 “미국은 더 이상 남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살포했다. 그러나 방화 과정에서 부산미문화원 안에서 책을 보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 당국은 3월 19일 저 수사기관에 비상 근무령을 내리고 현상금을 내건 체포 담화문을 발표했으며, 3월 30일 김화석, 이미옥, 최충언, 박원식, 최인순 등을 검거하고, 문부식과 김은숙을 수배했다.
불타는 미문화원(좌)과 구속되는 문부식(우)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후에 원주 교구 교육원에 은신해 있던 문부식과 김은숙은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인 최기식 신부 및 한강성당 주임을 맡고 있던 함세웅 신부와 자수 문제를 상의한 끝에 4월 1일 사건 발생 14일 만에 자수했고, 방화범 3명, 유인물 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에 동참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4월 2일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김현장이 문부식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검거되었으며, 최기식 신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검거되는 등 원주 인사들 15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계엄령,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최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에서 최고 사형까지 판결을 선고 받았으며, 문부식과 김현장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렸다가 1983년 국민화합조치의 일환으로 감형 조치되었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전국의 미 문화원도 반미투쟁의 표적이 되어 1982년 11월 광주 미 문화원에는 화염병이 투척됐고, 1983년 9월 대구 미 문화원에서는 폭발물이 터져 수 명이 사상당했다. 1985년 5월 서울의 미 문화원은 73명의 대학생들에게 점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테러리스트적 투쟁방식으로 인해 운동권일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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