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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 스콧 남극서 동사

산풀내음 2017. 1. 27. 11:02

1912 3 29,

탐험가 스콧 남극서 동사

 

한번도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곳, 그 남극점을 향한 인간의 처절한 도전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20세기 최고 명승부로 꼽히는 이 치열한 경쟁에 아문센(Roald Engelbregt Gravning Amundsen, 1872 7월 16 ~ 1928 6월 18)과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 06. 06 ~ 1912. 03. 29)이라는 걸출한 두 탐험가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두 탐험가는 성격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무서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철저한 아문센, 열정과 용기는 있었지만 무모한 스콧. 게다가 이 레이스의 결말에서 승자에게는 영광, 패자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Robert Falcon Scott

Roald Engelbregt Gravning Amundsen

 

당시 아문센의 본래 목표는 북극이었다. 북극은 노르웨이와 위치적으로도 가깝고 선배 탐험가 난센이 실패한 곳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 탐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남극으로 방향을 돌렸다.

 

출발은 영국의 스콧이 빨랐다. 1910 6 1일 영국을 출항한 스콧은 탐험선테라 노바의 뱃머리를 남극으로 돌렸다. 1904년에 남위 82 17분에서 발길을 되돌린 적이 있어 스콧으로서는 이번 탐험이 두 번째였다. 그의 조국 영국도 첫 북극점 정복을 미국에 빼앗겼던 터였다.

 

스콧이 호주의 멜버른항에 도착했을 때 한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람호가 남극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문센.” 노르웨이의 아문센이프람호를 이끌고 2개월 늦게 탐험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아문센 역시 남극탐험은 두 번째.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해를 최초로 성공했던 베테랑 탐험가 아문센의 돌연한 등장은 스콧에게는 충격이었고 위협이었다.

 

3개월이 남은 남극의 여름 동안 두 팀은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식량을 쌓아놓은 보급기지들을 미리 만드는 것이다. 영국 탐험대는 남위 79 30분까지 나아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쌓아놓고 '1톤 보급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르웨이 탐험대는 남위 80, 81, 82도의 여러 군데에 보급소를 설치하였다. 남극 480마일 반경 이내에 총 1.5톤의 보급소를 설치한 것이다. 또한 펭귄바다표범을 사냥하여 기지의 식량을 쌓아두었다. 두 베이스 캠프는 고작 40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두 탐험대는 서로 마주치기도 했는데, 의외로 큰 갈등은 없었고 나름대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11 4 21일 남극 대륙에서 해가 사라지는 긴 겨울 밤이 찾아왔고, 두 팀은 베이스 캠프에서 겨울을 났고 4달이 지난 8 24일이 돼서야 해가 다시 떠올랐다. 9 8,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아문센은 한 차례 프람하임을 떠나 남극으로 향했지만 너무 이른 출발 때문에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돌아와야 했다.

 

탐험의 성패와 생사까지 갈라놓은 것은 스콧의 준비소홀과 아문센의 치밀성이었다. 1911 10 20, 기지를 출발한 아문센의 탐험대 5명이 남극점을 향해 썰매를 몰았다. 52마리의 썰매 견이 썰매 4대를 끌었다. 11 7, 아문센은 남위 82도에 준비해둔 최후의 보급소에 도착했다. 최후 보급소에서 가져온 식량은 100일치로, 1912 2 6일까지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아문센 일행은 액슬하이버그(Axel Heiberg) 빙하의 얼음봉우리를 넘어 남극 고원에 이르기까지 1톤의 보급품을 끌고 갔다. 비어드모어 빙하의 기슭에서 스콧 일행은 마지막 조랑말을 잡았다. 남극까지 갔다가 기지로 돌아가는 왕복 거리는 1000마일이었다. 12 14일 오후 3, 마침내 관측기 바늘이 90도에서 멈춰 섰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것이다.

 

아문센 일행은 노르웨이의 국기와 프람 호의 깃발을 남극점에 꽂았다. 좌측부터 로알 아문센, 헬메르 한센(Helmer Hanssen), 스베르 하셀(Sverre Hassel), 오스카 위스팅(Oscar Wisting).

아문센 탐험대의 남극정복 인증 샷

 

아문센보다 13일 늦게 11 1일에 출발한 스콧은 중도에 판단착오로 썰매를 끄는 말들과 개들을 돌려보내고 사람 넷이서 썰매 하나씩을 끌었다. 1912 1 18, 마침내 스콧도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노르웨이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귀로에 있었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명은 미쳐 죽었고 동상에 걸린 1명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스콧을 포함한 세 사람은 기지를 18km 남겨두고, 그들이 만들어 둔 보급소에서 고작 800m 떨어진 곳에서 부둥켜안은 채 죽음을 맞았다. 1912 3 29일이었다.

 

노르웨이 탐험대가 남기고 간 빈 천막과 국기를 보고 망연자실한 스콧 탐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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