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9일

진시황릉 발견

산풀내음 2017. 1. 27. 11:11

1974 3 29,   진시황릉 발견

 

1974년 초봄 중국의 서부지방은 아주 심각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3 29양신만(楊新滿) 6명의 동네 청년 농부가 우물을 찾기 위해서 땅을 파 내려갔고 1m쯤 파내려 갔을 때 딱딱한 적토층이 나타나면서 잘 파지질 않았다. 더 이상 파지지 않자 곡괭이로 내려치는 순간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후 쉽게 파내려 갈 수 있게 되었다. 한참을 파내려 가다 보니 갑자기 떠낸 흙 속에서 도자기 파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밑으로 파내려 갈수록 점점 더 도자기로 만든 병사의 모습을 한 팔과 다리가 나타났다. 진시황릉 발굴의 서곡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처음 파낸 도용들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5m 정도를 파내려 가자 푸른 벽돌이 깔린 평평한 지면이 나타나고 부서진 용수철 장치로 발사하는 활 모양의 쇠뇌 3개와 녹이 슬어 푸른 형태의 화살촉 다발이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농부들에게는 관심 밖의 물건들이었다. 그들이 진정 바란 것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그곳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이곳이 수맥이 형성되어 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수리시설 관리인 팡수린(房樹民)이 그곳에서 물이 나오질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확인하고자 사양촌을 찾았다.

 

그는 그곳에서 도기 형태의 남자도기만 나온다는 말을 듣고 현장을 확인한 뒤, 이를 린퉁문화관에 근무하고 있는 리수팡에게 알렸고 이후 본격적으로 비밀리에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수천 점의 도기제 병사 인형이 묻힌 거대한 공간 병마용이 발견되었다. 이후 동마차갱, 기마갱, 동물갱, 수십마리, 개갑갱 수십 개의 부장품 구덩이들이 발견되면서 잊혀졌던 진시황릉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370여 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장장 37년에 걸쳐 이 능을 완성했다. 진시황 사후 아들 진2세는 그를 안장할 때 이 능을 건축한 공인들이 능의 비밀을 누설할 것이 염려되어 모든 공인들을 전부 능 안에 가두었으며, 왕궁내의 모든 미혼의 궁녀들을 진시왕과 함께 생매장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초패왕 항우와 농민 봉기군 황소가 이 무덤을 발굴한 적이 있지만, 그 안의 보물을 전부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도굴꾼들에 의해 여러 번 약탈당하고 심지어 90일 안 화염에 싸였던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