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3일

3.1발포 사건에서 제주 4.3사건까지 …

산풀내음 2017. 2. 5. 00:46

19484 3,

3.1발포 사건에서 제주 4.3사건까지

 

1) 3·1발포 사건

 

광복 후 어려운 경제 상황에 겹쳐 콜레라의 발병 및 극심한 흉년으로 당시 제주도민들의 생활은 참담한 상황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19473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 중 기마경찰이 탄 말의 말굽에 구경을 나온 어린이가 치이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를 본 주변사람들이 격분해 돌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를 바라 본 경찰은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들에게 총을 발포하여 일반주민 6명이 사망하는 제주도 ‘3·1발포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에 반대하는 반경(反警)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결과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에 동참한다. 당시 총파업은 관공서를 포함해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노동자, 각급 학교, 교사를 포함한 제주 노동자들과 학생까지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소요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카스티어(casteel)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으나,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다스리기보다는 남로당의 정치선동으로 규정하여 소요사태를 분쇄하는 데만 주력했다. 당시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를 남로당이 활동하는 ‘붉은 섬(Red lsland)’로 규정하고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하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3·10 총파업 이후 이듬해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파업 주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전개한다. 검거작전 개시 후 이틀 만에 200명이 연행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제주도민 약 2,500여명이 구금되고 이어서 이들에 대한 고문이 잔혹하게 자행된다. 이때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바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43일 새벽 2시에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한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을 중지하며,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는 등 단순한 사건을 이념적인 정치사건으로 비화시킨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되어, 소요사태를 경찰력과 서북청년단의 힘만으로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진행되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중장과 군정장관 딘(Dean)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의 출동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김익렬은극렬분자는 200~300명에 불과한 만큼 화평 귀순 작전을 시도하고,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토벌해도 늦지 않다며 제주도 군정장관을 설득해 이른 바先선무 後토벌이라는 단계적 해법을 채택한다. 그는 제주도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귀순활동을 펼치고 무장대와 비밀협상을 추진해 이른바 ‘4.28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김익렬은 무장대의 은신처인 대정읍 구억초등학교에 운전병만 데리고 들어가 무장대 책임자인 김달삼과 4시간에 걸친 진땀나는 담판을 벌인 끝에 평화협상을 체결하는데 성공한다. 4.3이 발발한 이후 25일만에 군과 무장대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않기로 극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1948. 4. 28. 협상 당사자들,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측 김달삼()

 

그러나 평화협상은 회담 사흘 후인 5 1일 제주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일단의 청년들이 들어와 12채의 민가를 불태우는오라리사건이 발생하면서 깨지고 만다. 방화사건 직후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오라리 사건은 평화협상을 파기하기 위해 경찰의 후원 아래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자행한 방화였음을 밝혀냈지만, 미군정은 이같은 김익렬 연대장의 보고를 묵살하고폭도들의 소행이라는 경찰측의 주장만을 수용, 9연대에 초토화 토벌명령을 내린다.

 

4.28 평화협상을 깨뜨린 오라리 방화사건. 미군 정찰기가 공중에서 오라리 마을을 촬영한 모습.

 

놀라운 사실은 무장대의 소행이었다면 그 누구도 사전에 알 수 없었던 오라리 방화 현장이 미군에 의해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입체적으로 촬영이 됐다. 그리고 이 필름은제주도의 메이데이로 명명돼 4.3을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폭동으로 조작하는데 이용됐다. 또 김익렬 연대장이 김달삼과 ‘4.28 평화협상에 합의한 다음날 미 군정장관인 딘 소장이 제주에 극비리에 방문했음이 훗날 밝혀진다.

 

이후 53일 미군정은 무장대에 대한 총공격을 경비대에 명령하는데, 이는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의 조기진압에 초점을 맞춘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중장의 결정 때문이었다. 5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18일 경비대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1948. 5. 5. 대책회의를 위해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 군정 수뇌부

1948 5 15 9연대 미고문관 리치 대위가 경비대의 한 장교와 함께 진압작전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김익렬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맨 오른쪽) 1948 6 18일 새벽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한다.

피신하는 주민들

 

이후 잠시 사태는 소강상태에 놓였으나 1948815일 남한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4.3사건의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인식하게 된다. , 단순한 3.1절 기념회에서 발생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남로당의 정치적인 전략전술과 그리고 이를 분쇄하려는 이승만 정부의 싸움으로 비화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그 해 10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의 설치와 함께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도에 증파하였고 11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에 앞서 9연대 연대장 송요찬은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중산간 마을에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벌인다.

 

 

1948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된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약 2만 명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로 교체 되었지만 강경진압은 여전히 계속된다. 한 마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00여명의 주민이 총살당한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모두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농업학교 운동장에서 귀순자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심문반(1949 4월·사진 위).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1948년 가을부터 제주지역 기관장과 유지들도 대거 수용되었다(1948 11월·사진 중앙).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 본부(1948 5월·사진 아래). /사진출처=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1949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한다. 19495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의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된다. 그러나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된다.

 

1949년 군과 경찰의 선무공작에 의해 산속에 숨어 있다 하산한 제주도민들. 이들 중 상당수가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19549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7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제주 43사건 관련 보고서들에 따르면 도민 28만 명 중 5만 여명이 죽었고 모든 마을의 77%가 초토화되어 이재민이 10만 여명이나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간접적으로 여순 14연대 반란에까지 이어져 또다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됐다.

 

4.3사건 희생자 시신들

일본군이 사용했던 진지동굴에 방치되었던 당시 9연대 장병들의 유골들. 이들은 공산 프락치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처형된 장병들이다. () 그리고2008 11월 제주국제공항에서 발굴된 4.3사건 희생자 유해들(아래)

 

2003 10 31일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이제주 43 사건에 대해 추모사업과 명예회복 등에 대한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43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차원의 첫 공식사과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