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7일

미국, 쿠바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 1961.4.15.- 4.20.)

산풀내음 2017. 3. 1. 20:20

19614 17,

미국, 쿠바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 1961.4.15.-4.20.)

 

쿠바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1898년에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였다. 이 전쟁은 미국 선박 메인호 폭발 사고의 배후로 스페인을 지목하여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훗날 스페인은 아무 잘못이 없음이 드러났지만)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쿠바는 1902년 미군정이후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주적 독립이 아니라 미국에 의한 것이었고, 또 미국과의 위치가 워낙 가깝다 보니 미국의 간섭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관타나모 항등에 기지를 건설하고 쿠바의 사탕수수 산업을 비롯한 주요 산업은 미국 자본의 손에 지배받았다. 더욱이 1920년 미국에서 금주법이 발효되자 이를 피해서 술마시고 놀려는 미국 사람들이 몰려 관광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요 산업은 미국 자본에 완전 지배되었고, 대다수 쿠바인들은 매우 빈곤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쿠바인들이 미국에 대해서 반감을 품은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이런 중남미 국가에서 흔히 볼수 있듯이 쿠바의 정치권은 무능하고 부패하여 국민들은 더욱 고통받았다. 1952년 독재자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는 대통령 선거 대신 쿠데타로 집권한다. 당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 - )는 반란을 일으켰다 구속된 후 석방되어 멕시코로 망명했다, 다시 체게바라(Che Guevara, 1928-1967)와 함께 바티스타 정권 전복에 나서 마침내 1959년 정권을 장악하고 쿠바를 공산화 시킨다.

 

Fidel Castro(R) and Che Guevara(L)

 

사실 미국은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철권 통치에도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1958년에는 미국이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쿠바에 카스트로 정권(1959. 1) 이 들어서고 일주일 뒤 미국이 쿠바의 신정권을 승인할 때만해도 양국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 재산을 몰수(1960. 8)하고 미국이 쿠바와의 단교를 선언(1961.1)하면서 쿠바는 미국의 눈엣가시가 됐다.

 

쿠바가 공산화 되기는 했지만 미국이 직접 군대를 파병할 명분은 부족했다. 그래서 당시 CIA 가 생각한 묘안은 미국에도 망명자들이 많이 있으니 이들을 이용해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CIA 는 자신들이 쿠바에 상륙하기만 하면 카스트로 반대파들이 봉기를 일으키리라고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상태였다.

 

1960년 미국의 마이애미 지역의 쿠바인 망명자들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모집한 CIA 는 이를 '2506여단' 으로 명명하고 비밀리에 훈련시켰다. 1961년 해가 바뀌고 본래 쿠바 침공작전을 계획한 아이젠하워 정권은 물러났지만 이를 계승한 케네디 정권은 이를 계속해서 추진한다. 침공 작전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CIA 가 지원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수송선과 무기 그리고 16 기의 B-26B 폭격기가 준비되었다. 이 폭격기가 필요한 이유는 쿠바 공군이 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이 작전이 미국과 관련이 없는 순수하게 쿠바인 망명자들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1500명이 넘는 지원자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실질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비밀이 유지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미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리라는 루머가 퍼진 상태였고, 쿠바는 미국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서 케네디는 침공 4일전 쿠바에 대한 군사 작전은 없다고 말했으니, 정녕 미국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셈이었던 것이었다.

 

1961 4 15일 쿠바 공군의 마크가 그려진 8대의 B 26 (본래는 A 26 인베이더로 당시엔 B 26으로 불렸다) 폭격기가 니콰라과에서 날아올라 무방비 상태의 쿠바 공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이날 폭격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이날 공습에 참가한 폭격기 중 2대가 실수로 플로리다로 날아간 것이다. 미국과 관계가 없다고 그렇게 사전에 연습하고 공들인 보람도 없이 말이다. 이날 공습에 대해 쿠바는 미국을 비난했고, 많은 국가들이 여러가지 정황상 당연히 미국이 배후라고 생각했다.

 

A26 Invader, 이것은 70년대 촬영된 사진

 

나름 준비와 각오를 마친 카스트로와 쿠바 정부는 전면전을 선포, 전군을 물론 자국 국민들에게까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반정부성향을 지닌 인사 약 10만 여명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반정부 인사들의 폭동이 벌어져야 했지만 카스트로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사전에 차단당했다.

 

1961 4 17, CIA로부터 훈련받은 1400여명의 쿠바 망명객들을 태운 7척의 미 함대가 쿠바 피그만()에 조용히 닻을 내렸다. 쿠바 내 반혁명 세력과 연합,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할 계획이었지만, 반혁명 세력도 미미한데다 망명객 안에 첩자까지 숨어 있었다.

 

 

쿠바군은 상륙부대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고 최정예 공수부대전차를 선봉에 세워 반격, 곧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상륙해오는 부대도 1년 이상 훈련을 반복해 온 정예부대들이라 쿠바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으나 10배가 넘어가는 병력의 차를 어쩔 수는 없었고 미 공군과 해군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명령전달이 늦어지며 오지 않았다.

 

여기에 쿠바 공군은 공습에서 살아남거나, 피해입은 비행기들을 긁어모아 최대한 수리하여 출격시켰다. 중화기를 실은 수송선을 폭격하여 격침시켰고 이로서 전세는 완전히 쿠바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피그만에 상륙했던 반군은 200여 명이 사망하고 1200여명은 포로로 잡혔다. 카스트로 정부는 곧장 재판을 통해 주동자급 게릴라들을 처형하였고, 미국은 53백만 달러 상당의 의료품을 쿠바에 지불하고 나서야 나머지 1,113명의 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체포되었던 반정부인사들은 이 침공을 명분삼아 숙청당했다.

 

피그스만 침공 당시 카스트로의 쿠바혁명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침공군 2506여단을 물리친 쿠바혁명군

피그만 침공 작전시 쿠바군에 포로로 잡힌 반군들

불타는 보급선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확정한 계획을 그해 초 갓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이 장고 끝에 승인한 침공 계획이었지만 실패에 따른 비난의 화살은 케네디가 뒤집어 썼다. 케네디는 국제사회에서 망신당한 것은 물론이고, ()국민 사과성명까지 발표하게 돼 지도력에도 상처를 입었다.

 

쿠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에 급속도로 가까워져 이듬해 소련의 핵미사일을 끌어들임으로써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시킨다. 뒷날 케네디는내가 그토록 어리석었단 말인가라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1962 12, 케네디 대통령은 마이애미 오렌지 볼에서 열린 행사에서 언젠가는 쿠바의 수도 하바나(Havana)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석방된 침공군에게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