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8일

3•15부정선거 규탄 및 이승만 폭정에 항거해 일어선 고려대학교

산풀내음 2017. 3. 2. 20:31

1960 4 18,

3·15부정선거 규탄 및 이승만 폭정에 항거해 일어선 고려대학교

 

우리 민족의 힘으로 세운 최초의 학교, 독립 운동에 힘쓴 수많은 선배들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민족 고대!"를 외친다. 고려대학교를 "자유 · 정의 · 진리 학생운동의 원천지"라 부르는 이유는 4.19 혁명 전 날 고려대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가 그 시작이다.

 


 

1960 4, 대한민국 학생들은 부정선거와 독재정권에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화가 나있었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4.19혁명의 시작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있었다. 불법 탄압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테러와 3.15 부정선거에 공분한 3천여 명의 학생들은 '고대'라는 글씨가 쓰인 띠를 머리에 두르고 4 18, 학교 측의 회유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교과와 애국가를 부르며 동대문을 지나 태평로로 치달았다. 학생들은 경찰의 구타와 연행에도 굴하지 않았다.

 

3.15 직후 부산, 대구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시위는 4월에 들어서야 서울에 상륙했다. 당시 대학 연합 시위가 본격적으로 계획되기 시작했으며, 4 15일에 있었던 합의에 따른 서울 시내 대학의 전체 거사일은 21일로 확정되었다.

 

고려대 학생들은 뚜렷한 행동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4월 신학기를 맞았고, 그 때 지방에서 상경한 하급 학년 학생들이 데모하자는 요구를 하였다. 4 11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터지자 학생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신입생 환영일인 1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선언문, 격문 등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하지만 16일에 낌새를 챈 형사들이 학교로 들이닥쳤고, 학교에서는 신입생 환영회를 무기한 연기시켰다.

 

학생들은 18일 아침 학교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오늘 점심시간에 사이렌을 신호로 인촌 동상 앞으로 모이게 하라"고 했으나 낌새를 챈 학교 측은 사이렌을 울리지 못하게 하였다. 허나 "인촌 동사 앞으로"라고 외치며 순식간에 3,000여명이 교정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플랜카드를 선두로 교문을 나와 국회의사당으로 달렸다.

 

당시 고려대학교 집회 모습

선언문 낭독

 

 

결국 안암동신설동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현 태평로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도착한 3000여명의 학생들은 1만여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주 역적은 우리 앞에 나와서 사죄하라! 3.15 부정 선거를 철회하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연행학생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4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 중인 용감한 고려대 학생들

 

유진오 총장과 선배 이철승 의원의 설득으로 농성을 푼 시각은 오후 640. 질서정연하게 귀교하는 학생들의 뒤를 7대의 버스와 2대의 트럭에 나눠 탄 경찰들이 따랐다. 720분경 을지로4가를 지나던 시위대열이 종로4가로 방향을 틀었다. 앞서가던 경찰차가 방향을 종로로 바꾸자 시위대도 무심결에 그 방향을 따른 것이다.

 

종로4가 천일백화점(현 광장시장) 앞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60여명의 깡패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쇠갈고리와 쇠망치·쇠사슬 등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학생 40여명과 기자 6명이 피를 흘리며 현장에 쓰러졌다. 이날의 폭력장면은 419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폭력이 휩쓴 서울의 야음(夜陰)’이란 제목의 기사와 함께 사진으로 생생하게 보도됐다. 조선일보 정범태 기자만이 유일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사진이 준 충격과 분노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서울 시내 학생들이 성난 파도처럼 거리로 뛰쳐나왔고 혁명은 도도하게 전진했다.

 



치깡패들에게 습격당한 고려대생들.

당시 깡패 동원은 정치깡패 임화수가 주동하였고 그는 5.16혁명 후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고려대학교 4.18 선언문

 

이 濁流의 歷史를 淨化시키지 못하면

친애하는 고대 학생 제군!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자유와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 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존경하는 고대 학생 제군!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 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

 

고대 학생 제군!

우리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라.

 

-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

-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제한다.

-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고려대 4.18 기념탑엔 조지훈 시인이 쓴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트린 아! 1960 4 18! 천지를 뒤흔든 정의의 함성을 새겨 그날의 분화구 여기에 돌을 세운다'라는 비문이 있는데 이는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1960 4 18일 당시의 생생한 정신을 느끼게 한다.


고려대 4.18 마라톤대회에 앞서 풍물을 치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풍물패


고려대학교 4.18 기념 마라톤대회





김태련씨가 털어놓은 `4·18 고대생 습격` 비화 (시사저널, 2004. 4. 6)


낙화유수김태련씨(71). 1950년대 자유당 시절부터 서울 동대문 지역을 무대로 조직 폭력배 생활을 한 그는 한국 건달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큰형님으로 통한다. 서울 경동고를 나오고 서울상대를 졸업해 인텔리 깡패로 통했던 김씨가 낙화유수라고 불린 데에는 사연이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잘 배운 사람이 깡패의 길로 접어들자 친척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정치 깡패로 지목되어 1961 5·16 쿠데타 직후 처형된 이정재씨의 행동대장이기도 했던 김씨가 고희를 넘긴 나이에보스 이정재를 회고하며 그때 그 자리에 사재를 털어 사무실을 냈다. 서울 종로 4가의 귀금속 상가 골목에 자리한 아담한 2층집. 지난 318대한연합상사라는 간판을 내건 김씨의 사무실 개소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내로라 하는 건달들이 몰려들어큰형님의 새출발을 축하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동대문 사단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냐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동대문 사단이란 자유당 시절 이정재씨가 이끌던 정치 깡패 집단을 말한다.

김태련씨와 그의 후배들은 동대문 사단 부활이라는 말에 손사래부터 쳤다. 김씨는 보스(이정재)와 자신의 추억이 묻힌 터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소박한 뜻으로 사무실을 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무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유당 말기 활동했던 깡패 출신들이다.

당시 경찰과 자유당 실세들에 의해 각종 정치 행사에서 반대파를 제압하는 해결사로 동원되었던 이들의 운명을 가른 날은 1960 418, 4·19혁명이 일어나기 하루 전이다. 경찰이 경무대 앞에서 발포하면서 비화한 4·19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4·18 고대생 습격 사건이었다. 김태련씨는 당시 행동대장 격으로 고대생 시위대와 충돌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를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나간 건달 세월을 회고한다면?
후회는 없다. 다만 자라나는 세대들이 우리 전철은 밟지 말아 달라는 뜻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일반 국민은 우리를 부랑아로 본다. 역대 최고 권력자들이 불러들여 애국심을 부추기며 이 일 저 일에 써먹었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정권은 바뀔 때마다 우리를 파렴치범으로 몰아 가뒀다.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잘못된 길로 빠진 젊은 건달들을 선도하고, 나이 들어 불쌍한 건달들을 돕자는 취지로 사무실을 냈다.

4·18 고대생 습격 사건 때 현장에 있었다는데.
그 날 오전 종로경찰서 김태홍 사찰계장이 3·15 선거 결과를 지지한다는 데모를 하라고 우리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종로 4가에 있던 경기도청 앞에 우리가 흰 장갑을 끼고 지지 데모를 하려고 모였는데, 시내에서 시위하다 안암동에 있는 학교로 되돌아가던 고대생 데모대와 맞닥뜨렸다. 깡패들이 벌인 3·15 선거 지지 시위는 경찰 지시로 계획된 일이었지만, 학생들과 충돌한 것은 사전 각본에 없었던 우발적 사건이다. 고대생들이 그때 반공청년단 사무실이 있던 종로 4가 길로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우리 깡패들과 충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학생 3백여 명과 우리쪽 20명 정도가 충돌했다. 그때만 해도 청계천변에 벽돌이 많아서 닥치는 대로 휘둘렀던 것이지 사전에 무기를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 사건으로 이정재씨가 사형당했는데.
이제야 밝히지만 이정재씨에게는 4·18 사건의 책임이 없다. 다른 쪽에서 뒤집어씌운 것이다. 자유당 말기에 당내 강경파는 이정재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반공청년당 종로지구당 위원장에 임화수씨를 내세웠다. 4·18 깡패 동원은 임화수씨와 신도환씨가 주도했다. 이정재 회장은 그때 집에 있었다. 유지광씨도 현장에 없었다. 이정재·임화수 씨가 사형당한 것도 죽을 죄를 지어서라기보다는 당시 시대적 희생양이었다. 5·16 군부는 민심 수습용으로 자유당 곽영주, 민족일보 조용수, 정치 깡패 이정재·임화수 등을 끼워넣기 식으로 죽였다.

4·18 고대생 습격 사건 후 개인적으로는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습격이 아니라 우발적 충돌이다. 그 날은 도망갔지만 이튿날 4·19 데모가 확산되고 나서 동대문경찰서에 붙들려갔다가 자유당 곽영주가 풀어주라고 지시해 모두 풀려나왔다. 그뒤 이박사(이승만 대통령)가 하야한 직후 다시 잡혀 들어가 16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다 나왔다. 내가 서울대 상대를 나온 덕을 많이 봤다. 나중에 처형된 이정재·임화수 씨랑 같이 미결수로 옥살이를 했는데 검찰과 재판부에 서울대 출신 동문이 많았다.


그 전에도 자유당 정치 집회에 동원되었는가?
1957
년 장충단에서 민주당 조병옥 박사가 유세할 때 우리가 가서 집회를 방해했다. 정재선 자유당 선전부장이 우리를 불러 지시했는데, 그때는 야당 집회장에 가서 방해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 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 대가로 우리는 정부에서 밀가루 15만 부대를 받을 수 있는 티켓을 얻었다.

5·16 쿠데타 이후 풀려나와서도 정치 깡패 활동을 했는가?
5·16 직후에는 정치 깡패를 소탕한다면서 막 잡아들이는 바람에 한동안 활동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김종필씨가 우리를 불러 멋쟁이라고 격려해줬다. 이정재나 임화수가 사형된 것은 안된 일이라고 위로했다. 1965년 한일회담 때는 외무부장관이 나를 불러 협조를 부탁해서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그 비밀 임무가 무엇이었는가?
한일회담을 반대해 국회에서 오물을 투척한 김두한 의원을 혼내주라는 지시였다. 김의원집 담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더니 가정부가의원님 없다고 했는데, 어딘가에서 숨소리가 들려 뒤진 끝에 장롱문 뒤에 숨은 김두한 의원을 발견해 흠씬 두들겨패고 나왔다.

지금까지 사업을 해본 일이 있는가?
건달 조직 생활을 좋아해서 사업을 해본 적은 없다. 평생 깡패 인생을 걸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내가 호남 애들을 많이 거뒀다. 그래서 지금도 호남 건달들이 나를 좋아한다. 전국 어디를 가나 20대 건달들도 내 이름을 대면 다 안다. 내 아들 나이가 마흔이 넘었지만 요즘도 나는 젊은 건달들에게큰형님소리를 들으며 산다.

고희를 넘긴 낙화유수 김태련씨는 평생 건달 외길을 걸었지만 슬하에 둔 12녀는 모두 반듯하게 성장했다. 아들은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한 제약회사에서 에이즈 백신 개발 연구팀장으로 근무하고, 두 사위는 국내에서 각각 의사와 무역회사 사장으로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는 말년을 세 손주의 재롱을 보며 지내기보다는영원한 큰형님으로 남는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