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6일

독일군, 게르니카 폭격(Bombing of Guernica)

산풀내음 2017. 3. 9. 20:17

19374 26,

독일군, 게르니카 폭격(Bombing of Guernica)

 

스페인은 사회당, 좌익 공화파, 공산당으로 구성된 인민전선 정부와 북아프리카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프랑코 장군(Francisco Franco, 1892-1975)이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 사이의 내전이 진행 중이었다. 1936 2월 선거로 집권한 인민전선 정부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혁명적 정책을 수행하였는데, 이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카톨릭교회, 지주 그리고 자본가 세력들을 등에 업은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Francisco Franco

 

1936 7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시작된 내전은 대리전의 성격도 띠고 있었는데, 당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집권하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파시스트 반란군에 무력 원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포르투갈 독재정권도 프랑코의 편에 섰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대 반파시즘 공화파 진영간의 대결 형태로 제2차 세계대전 전초전과 같은 양상을 띠었으나, 인민전선정부쪽을 지원한 국가는 소련뿐이었고, 여기에 각국에서 달려온 국제의용군(국제여단)이 가담했다. 당시 영국은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중립을 지켰으며 프랑스 역시 인민전선정부가 붕괴되면서 중립에 머물렀다. 더우기 영국 프랑스는 1938 9월 뮌헨회담에서 독일의 요구를 수용하는 유화정책을 취함으로써, 파시즘 대 반파시즘 구도의 전유럽적 확산속에 국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고대했던 인민전선정부를 좌절시켰다.

 

국제여단에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나중에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된 앙드레 말로도 참가해 각각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희망>을 썼으며, 조지 오웰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남겼다. 헤밍웨이가 존 던의 시를 인용한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어떤 친구의 죽음도 나 자신의 소모려니, 그건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1937 4 26일 오후 430, 독일 공군콘돌 군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Guernica)에 재앙이 내렸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고도(古都)로 분리독립을 원하는 바스크족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던 곳이었지만,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에 반대하고 공화파에 속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날, 프랑코를 지지하는 독일군은 전투기의 성능도 시험할 겸 그들이 자랑하는 하인켈Ⅲ와 콩커스 52를 주력으로 43대나 되는 폭격기를 게르니카 상공에 띄워 올렸다.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폭격은 마을의 70%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주민 7,000여명 중 1,600여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장날이라 북적거렸던 중앙광장에도 폭탄이 떨어지고 도망가는 부녀자나 노인들에게도 기총사격이 가해졌다.

 





폭격 나흘 후인 5 1, 게르니카에 진주하고 잔해를 치우는 프랑코파 군인들

 

폭격 다음 날 게르니카에 당도한 영국 타임 지 특파원 죠지 스티어는 건물 잔해와 잔뜩 파헤쳐진 땅들을 보고 분노해 '아무 군사적 시설도 없는 마을을 잔혹히 폭격한 끔찍한 민간인 살상!' 같은 요지의 기사를 썼고 이를 계기로 사건이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코측은 한때 공화파의 자작극이라며 발뺌했지만 곧 독일군이 조준불량과 경험부족 때문이었다고 실토함으로써 독일군이 자행한 공습으로 판명됐다.

 

 

이 사건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피카소가 그린게르니카때문이다.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고민하고 있던 피카소가게르니카의 피소식을 접한 것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곧 깊은 슬픔에 잠겼다.

 

6 4, ‘게르니카가 완성되자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7.82m ×3.51m)에는 고통과 분노, 절규와 죽음이 가득했다.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던 평소와 달리 흑·백을 주조로 한 단순배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전쟁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 2차대전 중 미국으로 건너간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