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6일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 발생

산풀내음 2017. 3. 9. 20:24

19864 26,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 발생

 

1986 4 26일 소련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북동쪽 100km 지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이곳에서 그린피스가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로 정한 비극이 일어났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4 26일 오전 1 23분에 발생했다. 사고 전날인 25일 오전부터 체르노빌 원전측은 원자로 4호기의 정기 점검을 위해 잠시 가동을 중단할 예정이었다. 4호기에는 원자로의 가동 중단 시 냉각 펌프와 다른 제어장치들을 돌릴 수 있는 비상용 디젤 발전기 3()가 있었다. 이 발전기들은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기까지 약 1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1분의 시차(時差)를 보완하기 위해 체르노빌 원전 차석 엔지니어였던 아나톨리 댜틀로프(당시 55)는 주 전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원자로 터빈의 관성에 의한 에너지가 원자로 냉각펌프 등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주 전원이 끊어질 때까지 전원의 출력을 낮춰보기로 한 것이다. 현장에 있던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당시 33)와 레오니드 토프투노프(당시 26) 20~30대 젊은 과학자들은 댜틀로프의 계획에 반대했다. 주 전원의 출력을 낮췄다가 다시 올릴 경우 원자로가 과열돼 폭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댜틀로프는 젊은 과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했다. 결국 댜틀로프의 무리한 실험은 젊은 과학자들의 우려대로 26일 새벽 원자로 폭발로 이어졌다.

 

4호기 원자로의 폭발 후 열흘 동안, 원자로의 노심에 있던 방사성 연료와 그 반응 생성물이 다량으로 누출되어, 폭발로 인해 감속재인 흑연 1200톤이 발화하여 생긴 기류를 타고 공기 중에 분출되었다. 누출된 방사성 물질의 양은 노심에 있던 총량의 3.8%에서 20%가량이다.

 

사고 당시 노심에는 200톤 가량의 우라늄이 있었으므로, 누출된 양을 질량으로 계산하면 약 10톤에서 40톤 사이이다. 누출된 방사성 원소의 종류는 40종 이상이고, 100종이나 520종으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들 중 가장 위험한 아이오딘-131 50% 가량, 세슘-137 30% 가량 누출되었다. 비활성 기체인 제논은 모두 누출되었다. 누출된 방사성 물질에 포함된 방사능의 총량은 약 14 엑사베크렐(1018 베크렐), 이는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에서 방출된 양의 약 400배 정도이다.

 

사고 직후 10시간 동안, 화재로 인해 인접한 3호기가 폭발할 위험성을 차단하기 위해 소방대원들은 물을 뿌려 원자로 주변의 화재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량의 물이 사용되었으며, 이 물은 4호로와 접촉하면서 증기로 변한 것이 내부 물질과 반응하여 가연성 물질로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26일 오후 9 41분에 다시금 대폭발을 일으키고 만다. 이 때 치솟은 불기둥의 높이가 자그마치 500m였다고 한다.

 

이후 5 5일까지는 군용 헬리콥터 30대 이상이 동원되어 2400톤의 납, 1800톤의 모래 및 붕소 등을 뿌려 내부의 화재 진압을 시도했지만, 이 시도는 오히려 원자로 내부의 온도를 높여 방사능의 추가 누출을 불러일으켰다. 최종적으로는 액체 질소를 원자로 내부에 투입함으로써 온도를 낮추어 화재를 진압했다. 화재는 5 6일까지 지속되었다.

 

화재가 진압된 후 1992년까지 소련 정부는 등록된 것만 60만 명에 이르는 인원을 "해체작업자"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여, 흩어진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고 파괴된 원자로와 원자로 내부에 남아 있는 방사성 물질을 봉인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들은 발전소의 직원, 우크라이나의 소방관과 소련의 많은 구성국에서 온 군인, 광부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사건 발생 7개월 후인 10월에 "석관"이라고 이름지어진 콘크리트제의 봉인 시설이 완성되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사고를 숨기기에 급급했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던 4 26일 아침, 사고 지점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1,200km 떨어진 스웨덴의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한 과학자의 의복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었고, 조사 결과 이 물질이 소련에서 날아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스웨덴 정부가 소련에 해명을 요구하여, 4 28일 소련 정부는 사고를 공표하였다.

 

 

당시 체르노빌은 발전소인 동시에 발전소 직원과 연구원, 주민 등 5만 명의 인구가 살았고 특히 100km 내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가 있었기에 이만저만 난리가 아니었다. 사고 초기에, 소련 정부는 사고를 공표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인근 주민들은 아무런 대비가 되지 않은 채 발전소에서 분출된 막대한 양의 방사선에 피폭되었다.

 

사고가 발생한 지 36시간이 지난 4 27일 오후에야, 발전소에서 4km 떨어져 있는 도시 프리피야트의 주민 45,000명이 1,100대의 버스를 통해 도시로부터 소개되었다. 이후 열흘 동안 사고 직후 발전소 주변 30km 반경에 살고 있던 11 6천 명의 시민이 원래 주거지로부터 소개(疏開)되었고, 1990년부터 1995년까지 21만 명의 시민이 추가로 소개되었다.

 

화재 진압 등의 과정에서 방사선 피폭에 의해 56명이 사망했으며 인근 주민을 제외하고 발전소 해체와 봉인을 위한 과정에 투입되었던 인부 중 고도방사선에 피폭된 사람은 2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이 중 2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외에 민간인 피해도 엄청나서 이후부터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갑상선암, 백혈병, 유방암 등등 온갖 질병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피해자 집계는 기준에 따라 다양한데 그린피스는 약 2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신체장애자 동맹은 우크라이나 내의 피폭자가 약 350만 명(그 중 미성년자 120)으로 사망자는 2005년 기준 150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했다. 한편 러시아 정부에 의하면 러시아의 피폭자는 145만 명이라고 한다.

 

1995년 발표된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태로 인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 3개국에서 900만명의 주민들이 직간접으로 피해를 당했으며 최소 6,500명에서 3만 명이 사망했고 최소한 80만명이 피폭우려자로 분류됐다.

 

 

사고 당시 발생한 방사능 낙진은 체르노빌 주변의 15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영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켰다. 당시 풍향 때문에 낙진의 70%는 벨라루스에 집중되었다사건 당시 벨라루스의 전 국토의 22%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었으며, 이는 2005년에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벨라루스 정부는 2016년에도 여전히 국토의 16%가 방사능에 오염된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방사능에 따른 벨라루스의 경제적 피해는 약 2350억 달러로, 이는 1997년 당시의 벨라루스의 국내 총생산의 10배 이상이 되는 수치이다. 벨라루스 말고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도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있었다.

 

체르노빌 원전은 2000 12 15일 영구 폐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