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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전범 처리를 위한 동경재판(Tokyo Trial) 개정

산풀내음 2017. 3. 16. 20:25

19465 3,

2차 대전 전범 처리를 위한 동경재판(Tokyo Trial) 개정

 

2차대전이 한참일 때 일본 군국주의가 침략의 손을 뻗지 않은 아시아 태평양지역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에 점령된 영토는 나치 독일의 그것보다 더욱 광대하였다. 거의 전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남북 7천 키로미터, 동서 1만 키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전역에서 전사자 117만 명, 부상자 461만 명, 일반 시민의 사상자 678만 명의 큰 희생을 치른 이 전쟁은 일본의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났다. 그 오랜 전쟁이 끝난 뒤 1945년과 1951년 사이, 연합국은 920명의 일본인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또다시 3천 여명에게 유기형에 처했다. 자업자득이었다.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전쟁범죄형으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Japanese Surrender aboard USS Missouri,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진

 

이 가운데 극동국제군사재판(흔히 동경재판이라고 불린다)은 주요한 전쟁범죄자들을 피고인으로 한 것이었다. ,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을 재판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 (동경재판) 1946 5 3일 동경 구육군성 대강당에서 개정됐다. 이 재판은 48 11 12일까지 진행되었을 정도로 연합국은 국제정세를 고려했다.

 

 

기소된 28명 중 도조 히데키 등을 비롯한 26명의 피고인이 무장한 MP의 지프의 호위를 받고 구치소로부터 도착했다. 오전 1117분 오스트리아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하자 법정에는 일순 긴장이 감돌았다. 수석검사가 11개국어로 된 기소장을 낭독했다. 기소장에는 `평화에 대한 죄` `살인범죄 및 살인 공모죄` `관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 3가지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고 구체적으로는 전쟁계획, 준비, 수행의 공동모의,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 노예화 등 55항목이 열거되어 있었다.

 

1) 전개과정

 

1946 2 18, 도쿄재판소는 연합국 최고 사령관 D. 맥아더에 의하여 W.F 웹 재판장(호주) 10명의 재판관(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인도, 네덜란드, 필리핀, 뉴질랜드) J.B 키난 수석검찰관으로 하는 30여 명의 검찰관이 임명되었다. 1946 4 29, 도조 히데키을 비롯한 피고인 28명이 A급 전범자로 기소되었고, 1946 5 3, 전범들에 대한 심리를 시작하였다. 도쿄재판에 피고인이 선정한 일본인 변호단 28명과 미국인 변호인단 2명이 참여하였다.

 


재판관들

 

1948 11 12, 판결문에서는 전체 55개의 항목 가운데 10개의 항목을 인정했다. 10개의 항목 가운데 8개는 평화에 대한 죄를 적용한 것이고 나머지 두 개의 소인이 통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가 적용됐다. 판결문의 낭독이 끝나고 비로서 심리 도중 사망한 마쓰오카 요스케, 니가노 오사미와 정신이상을 일으킨 오카와 슈메이를 제외한 25명의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A급 전범 25명은 교수형 7, 종신형 16, 금고 20 1, 금고 7 1명의 형을 선고 받았다. 1948 12 23, A급 전범 도조 히데키를 포함 7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피고인들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도조 히데키

 

 

2) 재판 이후

 

1978년 일본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이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주변국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2005 8 13, 요미우리 신문은 '검증 전쟁 책임'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도쿄재판을 비판했다. 내용에서는 "재판의 형식에 문제가 있었고 일본 국민 자신이 재판한 것이 아니다. 비참한 희생을 치른 앞의 전쟁에 대해 일본인 자신이 검증하고 전쟁을 저지할 수 없었던 정치 군사 지도자의 책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며 전쟁의 책임을 지도부에게 전가했다.

 

2009 1 24, 아사히 신문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15명이 변호인단 앞으로 제출한 자필 의견서 복사본을 국립공문서관에 입수해 공개했다. 이들은 의견서에 "태평양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위를 위한 전쟁이었다" 등 전쟁 책임 회피를 주장하는 글이 담겨 있다.

 

살인마들이 합장된 야스쿠니

 

 

3) 일본 천황의 전쟁 책임론

 

요시다 유타카(동경교육대학 문학부를 졸업, 일본 근현대사를 전공했다. 히도츠바시대학 사회학연구과 교수를 맡은 바 있다)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는 현재도 의견이 나뉘는 부분이지만 적어도 일국의 원수로서 패전의 결과 심각한 참화를 초래한 데에 대해서는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패전 직후부터 끈질기게 존재했다. 천황 자신도 자신에게 향한 그러한 비판적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던 듯 한다 <중략> CHQ가 점령 정책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현재의 동맹자로서 쇼와 천황을 이용한 것이 직접적 원인이었지만 냉전하에서 51 9월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애매하게 한 관대한 강화가 된 것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히로히토(쇼와 천황)는 동경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이에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퇴위론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1952 5월 독립을 축하하는 헌법시행 5주년 기념식 상에서 "이때를 맞이하여 짐은 매우 부족하나 과거를 돌아보고 여론을 살피고 심사숙고 오히려 자신을 독려하여 무거운 짐을 견디길 기대하며, 밤낮으로 오로지 자신의 능력이 미치치 못할까 두려울 뿐 이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퇴위를 거절하는 멘트였다. 이에 동경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을 받은 기도 코이치(히로히토의 최측근) "천황의 말씀을 듣고 국민에게 사죄한다든가 뭔가의 표현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는 뭔가 어금니에 이물질이 끼어 있는 것과 같이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 국민이 진정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던 점은 유감스럽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천황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 국민들에게 깊은 응어리를 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