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3일

마거릿 대처, 영국 최초 여성 총리에 당선

산풀내음 2017. 3. 1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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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영국 최초 여성 총리에 당선

 

1979 5 3 `고복지 고부담 국가의 지속인가 `자유주의 경제시장으로의 회귀`인가를 놓고 영국 총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영국은 1960년대 말부터 10여 년 동안 물가인상, 경제성장률 하락, 국제수지 악화 등으로 국가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개표결과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 10월 13~2013 4월 8)가 이끄는 야당 보수당이 안정 과반수 의석을 획득, 5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면서 영국 71대 수상이자 최초의 여성 수상이 탄생했다.

 

4 May 1979: Britain's first woman Prime Minister arrives at Downing Street to take up office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혈통,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총리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다. 1979부터 1990까지 세 차례나 총선을 승리로 이끈 정치가이자, 영국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총리이다. 역대 보수당 최장수 내각, 전후 최장수 내각 2관왕. 역대로 치면 5번째다.

 

윈스턴 처칠 이후 영국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구가한 총리이자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하나이며,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80년대 자본주의 진영(자유진영)을 상징하는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평가가 양극화되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그녀를 수식하는 대명사가 되다시피 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부터 '신자유주의마녀'라는 별명까지 평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1925년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난 대처는 귀족과 상류계급 출신이 많은 보수당 당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서민출신이었으며 쌍둥이를 출산한 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위대한 어머니였다. 게다가 실업가의 아내로서 가사업무를 담당하며 1959년 총선거에서 3번째 도전 만에 의원에 당선돼 의회에 진출한 당찬 아내이기도 했다. 그녀는 1975년에는 히스정권하에서 교육과학장관에 취임했고 그 해 실시된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대승, 사상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됐다.

 

In this 1945 file photo, future British prime minister, Margaret Thatcher ( extreme right) with her parents and sister, Muriel.

 

세계 정치사에서 대처여사보다 먼저 정치정상에 오른 여인들은 4명이나 있었지만, 이들 모두 남편의 사망에 따른 승계 부친의 정치조직과 권력기반의 후방을 이용한 어쩌면 대타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대처는 달랐다. 그녀는 어떤 부유한 배경 없이 스스로 정치의 초석을 쌓아 마침내 세계 정치 정상에서 오른 제1호 자수성가형 여인정치인이었다.

 

얼굴만 여성이었지, 그녀의 정치스타일은 윈스턴 처칠 못지않은 정통보수당의 체취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1970년대 IMF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영국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총리 자리에 오른 뒤 대처 여사는 일명영국병이라고 불린 악성 인플레를 극복하기 위해 긴축재정과 함께 노동조합 전횡 저지, 자유경제주의, 세제개혁 등을 강행, 병든 영국을 치료하는데 힘썼다. 그래도 경제가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의 인기는 곤두박질 쳤지만 1982년 발생한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처리즘(Thatcherism)'도 서서히 효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1983년 정부가 적자를 기록하던 20개의 석탄채굴회사의 문을 닫아버리면서 또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최강의 노조인 탄광노조가 반발한 것이다. 1974년 히스 정권을 몰락 시켰던 탄광노조는 1년 뒤 완패를 선언하고 대처에게 '철의 여인(Iron Lady)'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후 영국이 안정을 찾아가자 대처는 1983년과 1987년에 연거푸 총리에 당선되며 11년간 영국을 재정비했다.

 

 

대처 시기 성소수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이는 Section 28이라는 조치로 알려져 있다. 그 입법은 전세계가 AIDS의 공포에 떨던 80년대라는 호기를 타고 많은 기존의 많은 법에 저촉됨에도 불구하고 강행된다. 일단의 골자는 일체 사회적 매체에서 동성애양성애적 요소를 다루는 걸 금지했으며 공립교육상 반 동성애 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입법을 저지하기 위해 벌어진 동성애, 양성애자, 그리고 문화계의 투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필사적이었는데 법이 제정되는 1988 5 24, 시위대는 영국 국회의사당에 진입하고 공표가 있을 BBC 방송국의 아나운서 책상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버티기도 하였으며 문화계에선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커밍 아웃을 통해 Section 28을 막으려고 했다. 이 법은 2000년 스코틀랜드에서, 03년에 영국에서 폐지되었다.

 

 

대외적 외교 노선에선 1972년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의 은폐, 쿠데타로 수립된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지지, 아파르트헤이트를 고수하는 남아공에 대한 제재를 거부한 것이 오점이자 흑역사로 지적된다.

 

Bloody Sunday, Derry, Northern Ireland Jan 30, 1972

 

집권 말기에 유럽통합에 관련된 논쟁으로 당내에서 지도력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인두세 도입에 이르러서는 여론이 등을 돌렸다. 인두세는 여론의 가장 큰 반대를 몰고 온 정책이었는데, 이는 대처 내각이 소득도 없는 실업자들에게까지 투표권자 등록시에 세금을 물리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인두세 문제는 그의 총리직 사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인두세는 대처 퇴진 후 존 메이저 총리가 폐지시켰다.

 

대처에 반발한 보수당 의원들이 당대표 선거를 실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반수 획득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이지만, 단 네 표 차이로 1차 투표 당선(규정상 65%를 득표)에 실패. 사실상 리더십이 무너졌다고 판단하여 2차 투표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해 대표직에서 사퇴한다. 그리고 1991 5월 정계를 은퇴하였다.

 

당시철의 여인’ ‘호전적인 여장부’ ‘새로운 냉전의 용사, 숱한 화약 냄새 짙은 별명들이 정치판에서 남성 못지않은 값을 해낸 그녀를 대변해주고 있다.

 

마거릿 대처는 2013 4 8일 오전에 타계했다. 향년 87세로, 사망 원인은 뇌졸중. 그녀의 부고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성 정치인의 본보기"라고 평가했으며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장례식은, 자신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지길 원치 않으며 행사비용으로 '돈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 고인의 뜻에 따라 '국장에 준하는 장례 의식(ceremonial funeral)'으로 세인트 대성당에서 4 17일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