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5일

중국 민항기 피랍되어 춘천에 불시착

산풀내음 2017. 3. 18. 06:56

1983 5 5,

중국 민항기 피랍되어 춘천에 불시착

 

9명의 승무원을 포함하여 111명이 탑승한 중국 민항기 트라이덴트가 샹하이를 향해 출발한 시간은 오전 11(한국시간). 30분 후 대련상공에서 여자 1명이 낀 납치범 6명의 납치범이 트라이덴트기를 납치하여 타이완으로 갈 것을 요구하였다. 조종사는 이를 거부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총격이 벌어져 승무원 중 항법사와 통신사가 부상을 입었다. 기장은 기수를 평양으로 돌려 1240분 정도 평양상공에 머물렀지만 이를 눈치챈 납치범들이 재차 남하를 요구하여 서울로 갈 것을 요구하였다. 오후 159분 피납기가 휴전선을 넘어 오자 우리 공군 F-4 전투기가 급발진하였다. 동시에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에 공습경계공보가 울려 어린이날 휴일을 즐기던 시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납치된 중국 민항기는 우리 공군전투기가 출격하자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귀순의사를 밝혀 공군기의 유도에 따라 수도권에 내린 경계공보는 7분 만에 해제되었다. 결국 피납기는 지금은 없어진 춘천시의 미군 기지인 캠프 페이지(Camp Page)의 비행장에 불시착하였다.

 

 

납치범은 그 동안의 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우선 승객들을 위한 식량제공과 자유중국대사의 면담, 그리고 자유중국으로 안전한 망명을 요구하였다. 피납기의 승객들은 춘천 Camp Page기지에 착륙한 후에도 기내에 갇혀있었지만 사태를 파악한 당국의 안내로 오후 9시가 넘어서야 승객들과 납치범을 분리하여 춘천의 호텔에 투숙되었다. 승객들은 다음날 서울의 워키힐호텔로 모두 이송되었다. 승객들 중에는 일본인 승객 3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다음날인 5 6일 일본대사관에 인계되어 그날 오사카로 출국하였다.

 

비상 착륙한 첫 날은 불안과 긴장 속에 지냈던 승객들은 이때부터 호화판 패키지 서울관광을 즐기게 되었다. 호텔측은 화교출신 직원을 총동원하여 언어소통에 지장이 없도록 하고 워커힐의 가야금대식당에서 그들을 위한 공연도 베풀었다. 고층건물이 즐비한 여의도 금융가와 용인의 자연농원, 삼성전자, 기아자동차 등의 견학과 재래시장까지 둘러보았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개방이 덜 되어 낙후되어 이들은 서울의 발전상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당국은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홍보할 최적의 기회로 삼고 견학하는 기업체에서는 선물보따리도 한아름 안겼다. 당시 한 승객은 아내와 어린이한테 친절하게 보살펴 준 워커힐호텔 직원을 잊지 못해 훗날 그를 만나러 찾아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납치사건이 발생할 때는 우리나라와 중국사이에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6.25 전쟁 때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적성국가라는 점에서 많은 외교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이 사건이 벌어지기 몇 달 전 중공군 조종사가 MIG-19기를 몰고 우리나라 영공으로 들어와 망명을 요청하여 타이완으로 망명한 사건도 있어 중국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1983년 불시착 사건 때, 중국 정부가 대단히 이례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 사건당일 오후에 바로 민항국장 명의로 교섭 대표단을 파견할 테니 착륙을 승인해 달라는 전문을 발송했고, 이튿날 33명의 대규모 교섭 대표단이 파견됐다. 대표단원들의 신분은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인 '민항국 직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국 외교부와 정보기관의 부국장급 인사를 포함한 실무진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었다.

 

 

3일 간의 협상 끝에 5 10, 한국측 대표 공노명 외무부차관과 중국측 대표 선투는 피랍 승객과 승무원, 항공기를 조속히 송환하며, 무장납치범들은 한국 법에 따라 처벌하기로 합의하였다. 승객들은 부상으로 치료중인 승무원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대표단이 타고 온 특별기 B707으로 오후 330분에 중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들은 첫 날 불안 속에서 뜻하지 않게 우리나라에 찾아 들었지만 떠날 때는 우리측 환대와 선물을 한아름 받아 감사의 뜻을 여러 차례 밝히고 귀국길에 올랐다.

 

 

무장 납치범들은 대한민국에서 재판을 받고 각각 4~6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약 1년을 복역하다가 형 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1984 8 13일 인도적 차원에서 대만으로 망명하였다.

 

대만에서는 반공투사의 귀순이라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6의사'라고 불렸다. 그리고 대만정부는 그들에게 각각 3백만 달러의 포상금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그 중 3명은 대만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유괴살인범이 되어 2명은 사형을 선고 받고 저 세상으로 갔고, 1명은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다.

 


대만의 영웅이 어느새 죄인이 되어 ….

 

협상 과정에서 보듯 중국 정부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아주 신속하게 한국과의 협상을 조기에 체결하고 귀국했다. 이유는 당시 여객기 중에 중국의 최고 군사기밀을 쥐고 있는 미사일 전문 학자가 탑승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인 탑승객들이 한국 호텔에 투숙한 뒤 가장 먼저 자신의 신분증을 잘게 쪼개어 화장실 변기통에 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