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30일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1972), 북아일랜드 사태 격화

산풀내음 2017. 3. 27. 13:40

19721 30,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1972), 북아일랜드 사태 격화

 

1972 1 30일 영국의 공수부대가 시민권 쟁취를 위한 가두행진을 벌이던 아일랜드 구교도 시민 13명을 사살하는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 테러와 보복이 난무하는 북아일랜드 사태를 한층 격화시켰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뿌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그 이전에 영국에 의한 본격적인 침략이 12세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8세기부터 시작된 바이킹족의 침략이 어느정도 누그러지자 1172년 영국의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침략한 것이다. 수도 더블린이 함락되어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켈트족의 끈질진 저항으로 곧 물러가게 된다. 하지만 이후 1534년 영국의 헨리 8세가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여 아일랜드를 정복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당시 아일랜드와 영국은 모두 카톨릭 국가였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형의 부인이었는데 형이 요절하자 형수와 결혼하여 딸을 둠)과의 이혼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1534년 수장령을 내려 영국 성공회를 창립하였고 1536년과 1539년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카톨릭이 우세하였던 아일랜드에서 본격적으로 종교적 갈등이 시작된 것은 18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아일랜드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현 북아일랜드 지역으로 이주해 온 장로교인들은 카톨릭교인들을 몰아내고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을 가지게 되었다. 즉 영국 이주민들은 19세기까지 아일랜드의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잡고 토착민들을 억눌렀다. 그러나 1916 부활절 봉기영국-아일랜드 전쟁을 거쳐 1921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아일랜드의 32개 주 중 남부 26개 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했다. 1년 후 아일랜드 내전이 일어났다.




 

1949에 아일랜드는 영국 연방에서 탈퇴한 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 독립하였다. 결국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국토로 아일랜드 공화국이 수립된다. , 신생 독립국의 안정을 원한 아일랜드 정부에 의해 북아일랜드는 버려진 것이다. 이후 북아일랜드는 끝없는 분쟁으로 세계적인 분쟁지역이 되었다. 북아일랜드의 다수파는 영국계 개신교도들이다. 북아일랜드 주민 150여 만 명 가운데 60%쯤이 신교도고 가톨릭 교도는 40%가 채 안 된다. 이들은 지역 주도권을 놓고 오랫동안 다툼을 벌여왔다.

 

카톨릭 교도에 대한 영국의 차별에 항의하는 민권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68년이었으며, 1969년부터는 아일랜드공화군(IRA, Irish Republican Army)의 무장투쟁이 본격화되었다. IRA의 투쟁이 본격화되자 북아일랜드 신교도계는 얼스터 민병대를 조직하여 IRA에 대항하였다. 영국은 1972년에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회수하였는데, 이후 유혈폭력이 더욱 고조되었다.

 

1972 1 30일 영국의 공수부대가 시민권 쟁취를 위한 가두행진을 벌이던 아일랜드 카톨릭 시민 13명을 사살하는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하자, IRA도 영국과 영국계 신교도에 대한 무차별 폭탄테러에 들어갔다. 그리고 복수심에 불탄 젊은이들은 자진해서 IRA에 입대하는 등 사태는 악화되어만 갔다.

 




 

그리고 1981, 테러 혐의로 감옥에 갇힌 27세의 바비 샌즈(Bobby Sands)는 영국정부에 자신을 테러범이 아니라 정치범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는 단식을 시작했고 66일 만인 5 5일 새벽, 마침내 시인이자 투사였던 바비 샌즈는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사망 직전 옥중에서 영국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곧 그의 뒤를 따라 단식에 들어갔던 IRA 행동대원 9명이 죽어 나가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졌다. 북아일랜드의 거리마다 ‘우리의 복수는 우리 아이들의 웃음이다’라는 글귀가 쓰여졌다.

 


The funeral of hunger striker Bobby Sands, May 1981.

 

오랫동안의 협상 끝에 이들은 1998 4월 신·구교계 모든 정파가 모인 가운데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을 타결, 35백여 명의 목숨을 빼앗은 30년간의 피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평화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1998 8월 북아일랜드 오마시에서 또 IRA의 강경분파인리얼(Real) IRA’ 가 다시 폭탄테러를 저질러 28명이 죽는 등 2백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IRA 2005년 무장 해제를 선언하여 극소수 원칙주의자를 제외한 IRA의 무장은 공식적으로 해체된 상태. 그래도 산발적으로 무력 테러가 일어나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