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30일

백범 김구 선생 암살 배후로 지목된 육군 특수부대장 김창룡 피살

산풀내음 2016. 12. 4. 09:56

19561 30,

백범 김구 선생 암살 배후로 지목된 육군 특수부대장 김창룡 피살

 

악랄한 친일파로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 암살 배후로 지목돼 온 전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이 1956 1 30일 출근길에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역사의 심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으며 그의 나이 불과 41세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로 불린 김창룡(1916 7 18– 1956 1 30)1940초 일본인의 소개로 관동군 소속 헌병보조원의 이력으로 시작하여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인사를 감시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는 1943 9월부터 1945 8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조직을 적발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후 고향에 돌아왔다가 치안대에게 구금되었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 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다. 북한에서 살 수 없음을 알고 1946 결국 월남하였고, 전라북도 이리에 있는 국군 제3연대에 신병으로 입대한 후 1947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창룡은 반공 전선의 일선에 섰고, 동료들을 정탐하고 군부 내 좌익인사들을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남로당 간부들인 이재복이중업 등을 체포하였고,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 이주하도 그의 손에 체포되었다. 군 내에서 송호성 등이 좌익과 연계를 갖고 있다며 숙군 작업도 주도했는데, 그에게 용공 세력으로 지목 받은 장교들은 대개 송호성처럼 광복군이었거나 오동기처럼 중국군 소속으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오른쪽부터 박정희 대령, 김창용 대령, 이승철(첩보부대HID부대장) 중령

 

또한 여수 순천 사건의 진압과 이후 좌익 군인 색출 및 숙청작업을 주도했다. 1948 10, 여순사건으로 14연대가 통째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은 군법무관 김완용에게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때 김창룡이 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방첩과)가 나섰다.

 

1948 11 11일 김창룡과 정보 요원들은 박정희 소령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1949 3월까지 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이를 숙청했다. 당시 군 병력의 3%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단 박정희 소령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1920 - )을 위시한 각계의 도움에 힘입어 살아나게 된다. 백선엽 대령은 정보국 고문관인 이드 미육군 대위에게 부탁하여, 로버츠(William Roberts) 미 육군 준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육군본부의 재심사를 통해 형 집행정지을 얻어냄으로써 그를 불명예 제대하는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박정희는 6.25 발발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여수순천 사건, 부역자 색출 과정

 

1949 방첩대장으로 부임하였고, 그 해 6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었다. 이때 암살자가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포병 중위 안두희였으므로, 그의 배후로 의심받았다. 그는 백범이 저격 당한 1949 6 26일 암살범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시켜 쉬게 하고, 종신형을 선고 받은 그를 15년으로 감형시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안두희도 1992년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 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백범 김구 선생님


또한 1950년 여간첩 김수임 사건을 수사했다. 주한 미 수사기관의 고위직 고문을 유혹, 결혼해 살면서 고급정보를 빼내 자신의 애인인 남파 공산당 거물 이강국에게 계속 제공하다 검거된 사건으로 김수임은 1950 6 14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6 15일 사형언도를 받고 곧 처형됐다. 그러나 2001 AP통신에 따르면 이강국은 간첩이 아니라 CIA협조자였고 여간첩 김수임 사건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한국 전쟁 기간 중에는 북한에 협조한 부역자 처벌에 혈안이 되어 당시 내무부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 검거된 인원만 15 3825, 자수한 인원 39 7090명으로 총 55 915명이 부역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서울지역에서만 1298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정으로 북한과 협조한 사람들은 이미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김창룡은 사건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 10월 그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어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 한다.

 

1952 5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은 김창룡이 무기수들을 상대로 석방 조건으로 형무소 재소자 7명을 북한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 당했다. 하지만 김창룡 공작에 힘입어 이승만은 다음날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부산정치파동

 

1953년 김창룡은 ‘동해안 반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동해안 속초에 있는 1군단에 이승만이 방문하면, 이승만을 저격하고 김종평 육군 정보국장이 군 병력 1000명을 동원해 부산을 장악해 정부 요인을 처단한 다음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나중에 군법회의에서 여러 증인들이 김창룡의 조작임을 증언하면서 사건은 커지지 않았지만, 김종평은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1955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김창룡은 권력 투쟁에 적극 개입한다. 가장 먼저 타깃이 된 이가 정국은이었다. 정국은은 해방직후부터 국제신문, 국제통신, 국방신문, 태양신문 등을 운영했고 연합신문 주일 특파원으로도 활약한 저명한 언론인으로 여수·순천 14연대반란사건에 대한 군 당국의 대응태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는 등 정부당국의 미움을 많이 받아왔다. 그는 1952 9월 당시의 권력 2인자인 장택상 국무총리를 일본인 밀입국사건과 관련하여 민족반역자라고 보도했다.

 

또한 정국은은 이범석, 원용덕 등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출신이었다. 족청은 1946 10월 이범석이 민족정신의 전통을 계승할 청년운동의 모체로 결성된 단체로 이승만의 외곽지원 세력이기도 하였지만 대한청년단과의 흡수 과정에서 이승만의 명령에 단계적인 합류안을 내놓는 등 저항을 하자, 이승만은 1948 1 5일 담화문을 내 족청의 해산을 공식 촉구하였다. 1949 2월 족청은 해산되었고 이범석은 국방장관에서 해임되었다.

 

김창룡은 족청을 밀어내기 위해 1953 8 31일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국회 조사위원회까지 구성케 한 `정국은 사건`은 연합신문 사장이었던 족청계의 양우정 의원 구속으로도 확대됐다. 김창룡 반대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정국은은 끝내 12 5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1954 2 19일 처형당했다.

 

정국은 처형 직전 모습. 당시 판사였던 태윤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간첩으로 몰아 죽게 했던 사건인 만큼 인간적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당시 상부의 의견이 사형 쪽이었고, 언론의 대문짝만한 보도 때문에 여론도 비등해서 사형으로 결정됐지요.

 

1955 11, 일제 경찰 출신으로 공작의 달인인 노덕술 헌병사령부 범죄수사단장(중령)이 파면됐다. 노덕술 또한 김창룡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군수물자를 빼돌린 정황이 포착됐고,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 사건도 김창룡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노덕술을 제거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밖에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까지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혁혁한 전공과 실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는 가운데, 자신보다 상관인 강문봉 중장 등을 무시하면서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된다.

 

그는 군과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국 1956 1월 30 오전 7 30분 서울 원효로 1가 출근길에 당시 육군 제2군사령관 강문봉 중장이 배후를 조종하고 보낸 육군 허태영 대령 등 4명의 용의자들에 의해 피격, 현장을 탈출하려 하였으나 추가로 쏜 권총 다섯 발을 맞고 사망했다.

 

김창룡 피살 사건 범인 이유회(왼쪽)과 허태영(오른쪽).

 

이승만은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육군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군은 전국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전군 장병의 휴가 및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재판에서 허태영, 이유회, 신초식, 송용고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관련자들에게도 징역 3년에서 20년 사이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허태영과 이유회의 형 집행을 앞두고 있던 1956 11, 김창룡 암살사건의 배후가 있다는 허태영의 처 황운하의 탄원서가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배후에 대한 새로운 수사가 진행되어 강문봉 중장과 공국진 준장, 강홍모 대령, 성정모 대령, 백학규 중령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강문봉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결국 1957 9월 허태영과 이유회의 사형이, 1958 5월에는 신초식과 송용고에 대한 사형이 각각 집행되었다.

 

그러나 강문봉은 사형 선고 후 이승만에 의해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강문봉을 사형시킬 경우 그 윗 선으로 알려진 정일권 대장으로까지 의혹이 확산될 수 있었고, 이는 군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일권이 정말로 김창룡 암살사건의 최종 배후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김창룡이 정일권, 강문봉 등이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쓰레기 소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