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30일

월맹-베트콩의 구정(舊正) 공세(테트 공세, Tet Offensive)

산풀내음 2016. 12. 4. 10:19

19681 31,

월맹-베트콩의 구정(舊正) 공세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남부 월남은 친미주의자 고 딘 디엠(옹고딘지엠, 1901-1963)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물러난 프랑스인들이 옹립한 바오 다이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공화국정부를 수립한 다음에 절대권력을 보유한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고 딘 디엠은 제네바 협정에서 체결한 1956년도에 월남 전지역에 걸쳐 단일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총선 실시를 거부했다. 당시의 월남 분위기로 볼 때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민족주의자로 추앙 받는 호찌민(胡志明, 1890-1969)이 최고 통치자로 선출될 것이 확실시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딘디엠()와 호치민

 

미국은 고 딘 디엠이 남부 월남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막대한 양의 군사물자와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1만 7천여 명의 군사지원 고문단을 상주시켰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은 대규모 지상군을 파견, 1965년 말에는 미군병력이 18만 명으로 그리고 1년 뒤인 1966년 말에는 48 5천명으로 증가시켰다. 미군은 월남군 및 연합군(한국군, 호주군, 태국군 등) 130만이 넘는 군사력을 유지했으나, 베트콩만을 상대로 한 소모전만 벌일 뿐이었다.

 

북부 월맹의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은 "미국이 월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해 우세한 기동력과 화력을 보유한 미군과의 싸움에서 월맹이 군사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해졌지만 정치적으로는 비관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1967년 월맹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는 사이공 정부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데 불안을 느낀 나머지 일거에 승리를 달성하는 새로운 모험을 결의했다. 호찌민과 지압은 1968년도 구정에 총공세를 실시해 도시를 중심으로 민중봉기를 유발하기로 결정했다.

 

월맹은 7일간의 구정휴전을 발표하면서 미군과 사이공 정부를 안심시켰다. 이를 믿고 구정축제 준비에 바쁜 사이공 정부 몰래 월맹은 기습공격을 소리 없이 준비했다. 북베트남 인민군(North Vietnamese People's Army of Vietnam )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베트콩 Viet Cong)은 1968년 1월 30일 저녁 늦은 시간에 총공세를 하였다. 그들은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공격을 필두로 5개 직할시와 36개 성 등 수십 개의 촌락을 공격했다. 미국 대사관 공격은 심리적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소식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구정공세는 대부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들은 1월 31일부터 2월 11일까지의 전투에서 참가 병력의 약 절반에 가까운 35천명이 사살되고 58백명이 생포됐다. 구정공세는 궁극적으로 군사적 패배를 가져온 자살적 공세였으나 정치-심리적으로 월맹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미국 언론은 베트콩의 대규모 손실보다 전사 534명과 부상 2,547명인 미군 손실을 대서특필했다. 1968 3 31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언론과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월맹에 대한 폭격중지를 선언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월맹의 구정공세는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미국이 협상을 제의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치-심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특별한 결전으로 전쟁사에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