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7일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 사망

산풀내음 2017. 4. 4. 20:26

2002 5 17,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 사망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씨가 2002 5 17일 저녁 모스크바 중앙의료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된 뒤 사망했다. 성씨의 사망원인은 지병인 심장병과 신경성 질환이었다.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과 김정일의 첫 동거녀 성혜림(). 어린시절 어머니를 잃은 김정일은 연상의 성혜림에게서 모정을 느껴 동거를 시작했으며 이후에도 어머니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여성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성혜림(1937-2002)1937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대대로 갑부였던 성유경(成有慶)과 김원주의 1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성씨는 명륜동이 집이어서 서울사대부국을 다녔으며 월북 무렵 서울사대부중 학생이었다. 부친 성유경씨는 창녕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 일본 법정대를 나왔다. 해방 전후 서울 혜화동에 살았으며 보성고보 16회 졸업생으로 좌익활동을 하며 해방 후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1946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재정부장을 지냈다. 어머니는 1907년 진남포에서 태어나 서문여고(평양여고)를 졸업하고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인 <개벽>의 여기자까지 했던 김원주였다. 역시 좌익활동을 하여 해방 후 '남조선 민주 여성동맹' 문화부장을 지냈다. 1948년 대규모 좌익검거선풍이 불자 성유경과 김원주가 자식들을 데리고 월북했다. 그 중 오빠 성일기는 성인이 된 뒤 북한을 탈출했다.

 

성혜림에게 김정일은 첫 결혼이 아니였다. 소설 <>으로 알려진 월북작가인 리기영의 아들 리평과 결혼했다. 딸 리옥돌을 낳은 유부녀였다. 하지만 유부인 성혜림은 시동생인 리종륜의 죽마고우인 김정일 집에서 자주 드나들다가 김정일과 불륜관계를 시작하였다. 덕분에 성혜림은 공훈배우로 입당하게 되었고, 1969년 무렵 아예 김정일과 살림까지 차렸다(언제 리평과 이혼했는지는 불명). 그리고 1971 5 19일에 김정남을 낳았다. 친어머니 김정숙을 일찍 여의고 편부 슬하에서 자란 김정일은 연상의 여인을 좋아했고, 김정일보다 5살 연상인 성혜림은 그런 김정일의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성혜림 역시 리평과의 결혼이 애정이 없는 중매결혼이었던 반면, 김정일과는 예술이나 취미생활에서 여러모로 죽이 잘 맞았기에 그와의 만남을 지속했다.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동거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 그러나 성혜림이 갑자기 잠적하자 영화계에서 소문이 안 날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눈치 챈 사람들이 성혜림과 같은 남조선출신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성혜랑은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김정일 비서와 내 동생이 살고 있다는 것은 북조선 최대의 극비사건으로 간주되었다. 아버지(성유경)에게도 말씀을 안 드렸다. 처음에는 혜림이 ‘3호 청사’ 공작원으로 뽑혀갔다고 말했다. 이런 거북한 사정 때문에 어머니는 6년 동안 관저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설마 그런 일이 어떻게 한 가정에서 지속되었는가 의문시 될 수 있으나 온 사방에서 보위원이 우리 식구들의 언행을 탐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명배우 성혜림이 잠적한 데 대하여 사회에서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문화예술계, 특히 촬영소 언저리에서는 지도자가 채서 산다는 소문이 속살속살 퍼지고 있었다. 가계(수령과 지도자의 직계)에 대한 여론을 엄단하던 보위부와 당 조직에서 아무리 강권을 써도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촬영소에서도 나의 직장에서도 사람들이 말질을 하다가 없어지는 수가 있었다. 김정일과 성혜림의 비밀동거 소문이 퍼져가자 시아버지 리기영의 귀에도 들어갔다. 선비였던 리기영은 붓을 꺾어버리고 이후 글 한 줄 쓰지 않았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에는 지금까지도 의문로 남아있는 사건이 터진다. 평양 순안비행장을 출발하여 파리로 향하던 조선민항 소속 소련제 여객기가 이륙 직후 추락하여 폭발한 것이다. 여객기에는 문화예술인 1백여 명이 타고 있었다. 특히 그 전까지는 되도록 외국에 잘 보내주지 않던 ‘남반부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탑승자들은 전원 사망했다. 북조선당국은 사고 후 “비행사의 조종 기술 미숙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사고 비행기의 조종사가 북조선의 ‘영웅 비행사’인 김만억이었다는 점이다. 김만억은 김일성이 외국으로 나갈 때 매번 책임조종사를 맡았던 북조선 최고의 1급 조종사였다. 김일성은 김만억의 조종기술을 아껴 공개석상에서 ‘우리 만억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김만억은 60, 70년대 북조선의 농업위원장을 맡았던 김만금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아직도 의문의 사건으로 남아있다. 숙청된 문화예술인들은 김정일에게 ‘혐의’를 돌렸지만 그렇다고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정일과 성혜림에 대한 이야기는 북조선사회의 금기사항이 됐고, 다시는 언급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성혜림은 김정일과 중성동 15호 관저에서 동거에 들어갔으나 이후 정신적으로는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특히 1973년 김정일이 김영숙과 공식적으로 결혼하게 되자 병원에 자주 입원하더니 간병차 모스크바에 다녀오곤 했다. 김정일과 성혜림의 동거생활은 처음부터 곡절이 많았다. 특히 60년대 말 계모 김성애와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던 김정일로서는 유부녀를 가로 채 동거한다는 사실을 김성애가 적발해내고 이를 김일성에게 일러바치면 결정타를 맞을 수 있었다. 성혜림과 김정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는 성혜림에게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한번 결혼해서 애까지 딸린 여자니까, 게다가 불륜으로 결혼했으니까 당장 꺼지시오! 물론 정남이는 내가 정성껏 키워주겠고, 언니의 노후는 잘 보살펴 주겠소. 뭐 선택은 알아서 하시오. , 내 제의를 거절하면 우리 아버지한테 일러바칠 거요”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성혜림은 아이를 데리고 관저를 나가버리기도 했다. 나중에 성혜림이 “정남이를 데리고 시아버지 김일성에게 찾아가겠다”며 고집을 부리자, 김정일은 권총을 빼 들고 “쏴 죽인다”고도 했다고 한다.

 

성혜림은 1974년경부터 병 치료차 모스크바에서 살았다. 드러낼 수 없는 김정일과의 비밀생활로 인한 극도의 불안과 신경쇠약 등으로 이국땅에서 고생하던 성혜림은 65세의 나이로 2002 5월 모스크바에서 쓸쓸히 사망했으며, 장례절차 없이 모스크바의 한 묘지에 매장됐다.

 

그녀의 조카인 이한영은 한국으로 망명하였고, 14년 후 이한영은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에게 연락 하여 망명하게 한다. 이에 성혜랑은 1996 2월 모스크바를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한영은 엄마와 만나지 못하고 97 2 15일 분당 서현동 현대아파트 현관 앞 에서, 북한 간첩이 쏜 총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에 성혜랑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남한으로 오지 않고 어디선가 숨어 살았다.

 

김정일의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