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1일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발생

산풀내음 2017. 4. 10. 20:15

1964 5 21,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발생

 

1964 5 21일 새벽 공수단 제1특전단 소속 최문영 대령이 지휘하는 장병 8명과 공수단 출신 민간인 2명이 완전무장하고 법원에 난입, 소동을 벌였다.

 

민정 이양 후 박정희의 졸속적인 한일회담이 추진되던 중 1964 5 20일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벌인 한일 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가 열렸다. 시인 김지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장례식이었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는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 놓는다.”로 김지하의 조시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에 의하면 숨이 막혀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신랄하고 날카로웠다.

 

1964 5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 시위에서 경찰은 180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을 체포,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그런데 영장 담당 양헌 판사는 일부 피의자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상식적인 이유로 구속 영장을 기각한다.

 

그런데 이들은 20일 낮 에 참가한 주모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많이 기각했다는 연락을 받고 정치근 담당검사와 양헌 판사에게 압력을 넣기 위해 5 21일 새벽 4 30분에 서울 서소문 법원청사에 난입했다. 하지만 양 판사가 퇴근했다는 말을 듣고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양판사 집까지 찾아가 위세를 과시, 공무중인 판사를 협박했다. 그들은 데모 학생 영장을 왜 기각했소. 영장 서명을 약속하시오.”라고 하며 급기야 수류탄을 꺼내 판사 코 앞에 들이밀고 협박했다.

 

사건 이 후 대법원장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국회에서도 대통령 탄핵까지 꺼내 들며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지만,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과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항변을 하였다.

 

이 사건은 3일 뒤인 6.3사태를 낳는 한 계기가 되었고 판사 집에 쳐들어간 군인들은 6 6일 또 다른 난리를 치르고서야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6 6일 새벽 최 대령 등 제1공수특전단 소속장교8명이 술을 마신 후 순찰도중 동아일보사에 침입해 숙직중인 김광희 기자에게 법원난입 사건으로 구속당한 황길수 대위 등에 대해 인신공격성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약 45분간 폭언을 하는 등 행패를 부린 것이다7 10일 제6군관 구계엄보통군법회의는 법원 및 동아일보사 난입사건의 판결공판을 열고 주모자 최문영 피고인에게 징역 5, 관련자 4명에게는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장교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 하사관등 13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에 난입한 공수단 장병들에 대한 재판 장면

 

양헌 판사는 그로부터 10년 뒤 1971년 세칭 서울대생 신민당사 난입 사건에서도 법원 안팎의 압력을 무릅쓰고 전원 무죄 판결을 내린다. 결국 정권은 1973년에 양헌 판사의 법복을 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