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1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임

산풀내음 2017. 4. 10. 20:24

1998 5 21,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임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 1921 6월 8 - 2008 1월 27)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1998 5 21일 짤막한 사임성명 발표로 32년간에 걸친 기나긴 철권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사임을 발표하는 장면은 인도네시아 국내는 물론 CNN에 의해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권좌에서 쫓겨나는 늙은 독재자의 회한과 최후의 변을 전세계인들이 지켜본 것이다.

 

1998 5 21 76세의 노회한 정객 수하르토 대통령은 마침내 7년 임기중 두 달을 넘기지 못한채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32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다.

 

이날 오전 9시에 시작된 사임성명에서 77세의 늙고 고집스러운 독재자는 실제 국민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2억 국민 위에 군림한전제군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나한테 어떠한 실수들과 부족한 점 및 실패들이 있었다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고 국민에게 용서를 빌었다.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로 사임성명을 발표한 수하르토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인지사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잘 쓰지 않는용퇴라는 표현을 썼다. 사임의 변 또한 완곡하기만 했다. 수하르토의 사임후 B J 하비비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수하르토가 퇴진할 때까지 국회의사당을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나흘째 점거농성을 벌이던 수천명의 대학생들은 이날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로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일부는 국회의사당 분수대로 뛰어들어가 솟구쳐 떨어지는 물을 맞고, 일부는 플라스틱 물통을 두들기면서 그 리듬에 따라 춤을 추고, 일부는 인도네시아 국가와 운동가요를 불렀다. 한마디로 축제와 열광의 도가니였다. 전세계 언론들은학생운동이 인도네시아 정치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고 보도하며, 수하르토 32년 철권통치를 종식시킨 공을 학생들에게 돌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환호하는 국민들

 

수하르토의 퇴진은 19977월 외환위기라는 괴물이 아시아를 엄습하기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46만 군부를 사병화해 정치적 반대파를 철저하게 탄압해온 수하르토는 문자 그대로 난공불락의 성으로 보였다.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은 비록 맨주먹이었지만 그런 수하르토와 정면대결하길 주저하지 않았고, 마침내 국회의사당 점거농성이라는 극적 상황을 연출한 끝에 수하르토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의 투쟁은 1998 3월 초 수하르토가 일곱 번째 대통령직 연임을 강행하면서 불붙기 시작했다. 거의 날마다 전국 주요도시의 대학 캠퍼스에선 수하르토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보안군과 경찰은 학생들을 교내에 묶어두기 위해 캠퍼스를 봉쇄했지만, 학생 시위대의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거리진출 시도도 늘어만 갔다.

 

학생시위가 본격화고 두 달 정도 흐른 54, 학생시위는 전기를 맞았다. 수마트라섬의 최대 도시 메단에서 보안군이 캠퍼스에 진입해 과잉진압을 자행하자,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대규모 거리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날 정부는 유류 및 전기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철폐한다고 발표했다. 휘발유 값만 하더라도 다음날부터 한꺼번에 71%나 인상된다는 소식은 이미 가뜩이나 물가고에 시달리던 시민들까지 거리로 내몰았다. 메단은 삽시간에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반정부시위 도중 보안군과 시위대간 유혈충돌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정부당국이 처음 시인했을 정도로 메단사태는 심각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난 512, 수도 자카르타의 트리삭티대학에서는 보안군의 발포로 대학생들이 처음 시위현장에서 숨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4명의 트리삭티대학생의 죽음은 즉각 자카르타를 분노로 몰아넣었다. 폭동과 약탈, 파괴가 자카르타를 휩쓸었다. 학생들은 수하르토 퇴진과 민주화라는 자신들의 목표가 무분별한 폭동사태로 실종될지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수하르토가 사회혼란을 빌미로 군부의 강경진압을 이끌어내면서 정치개혁 요구를 묵살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학생들은 15일 수하르토가 카이로 개발도상국 정상회담에서 급거 귀국하고 보안군이 자카르타에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자, 대규모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조용했던 주말이 지나가고 18일 월요일이 되자 학생들은 국회의사당으로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자카르타 소재 대학뿐 아니라 메단, 족자카르타, 반둥 등지의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낮에는 1만 명 이상이, 밤에는 수천 명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채 수하르토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나흘 뒤 수하르토는 권좌를 바차루딘 주수프 하비비에게 넘겼다. 국회의사당 점거농성은 인도네시아 학생운동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1998 5 14일 자카르타 시내 폭동. IMF 요구에 따라 수하르토 정부가 기름값을 올리자, 시민들이 수하르토 퇴진을 요구하며 과격한 시위를 벌였다.

국회로 간 시위군중들

 

그러나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은 수하르토가 물러나자 전열이 흩어지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국회의사당 농성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수하르토가 물러나자성취감에 빠져든 모습을 보였다. 농성과정에서 결성한 첫 전국운동조직인자카르타학생포럼을 해체한 것이다. 또 하비비 대통령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려 격론을 벌였다. 학생들의 국회의사당 점거농성은 결국 수하르토의 오랜 측근인 하비비 대통령이 522일 약간의 개혁성을 가미한 거국내각을 구성한 뒤 투입한 군 병력에 의해 강제 해산했다.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은 지난 65∼66년 수하르토 장군이 수카르노 대통령을 몰아내고 신질서(오르디 바루) 체제를 세울 때, 수하르토 장군의 편에 서서 정권 교체에 한몫 한 경험이 있다.

 

당시 대학생들은 경제 실정과 부정부패로 극심한 인플레를 초래한 수카르노 정권에 등을 돌리고 수하르토 장군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곧 실망하고 말았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수하르토는 군부 일각의 쿠데타 시도가 공산당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한 뒤 대대적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을 벌여 50만여 명을 죽였다. 비공산권에선 최대 규모였던 350만 당원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궤멸했다.

 

수하르토 정권의 개발독재에 실망한 학생운동세력은 60년대 말부터 반수하르토 운동을 펼치기 시작해, 77년 수하르토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철저한 탄압으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의 아시아 통화위기를 계기로 인도네시아 학생운동은 부활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