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3일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산풀내음 2017. 4. 30. 02:02

1947 6 3,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힌두교도가 대부분인 인도에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 8세기부터였다. 조금씩 인도를 침입하던 이슬람 세력은 바부르가 인도의 혼란을 틈타 갠지스 강 유역을 정복하고 델리를 수도로 삼아 무굴 제국을 세우면서 완전히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무굴(Mughal)이란 아랍어로몽골을 뜻하는데, 이는 바부르가 칭기즈 칸의 후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굴 제국은 다수 주민인 힌두교도를 회유하지 않고서는 인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힌두교도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힌두교도외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이 때문에 무굴 제국은 인도 반도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도에는 이슬람 세력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Army of the Mughal Empire

 

그러나 너무 급진적으로 인도 전체의 이슬람화를 추진하면서 힌두교도들의 불만을 사게 되어 결국 제국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무굴 제국이 혼란에 빠진 18세기 후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영국은 자유 통상권을 얻으며 점차 세력을 넓혀 갔다. 19세기가 되자 마침내 영국은 무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면서 주민들 간의 단결을 막기 위해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대립시키는 정책을 폈다. 당시 알라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는 이슬람교와 세상 만물을 신으로 섬기는 힌두교 간에는 충돌이 잦았고,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신자들의 다툼을 교묘하게 용해서 인도인들을 분열시키는 식민지 정책을 썼던 것이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05, 영국은 벵골 분할령(Act of Bengal Partition)을 발표한다. 인도 북동쪽에 있는 벵골은 영국의 통치에 가장 거세게 저항한 곳이었다. 이 법은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던 곳을 동벵골, 힌두교 신자들의 지역을 서벵골로 나누었다. 인도의 민족운동이 힘을 얻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분노한 인도인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저항했다. 영국산 면직물을 불태우고, 상점과 공장 문을 닫았다. 인도국민회의에서는 '영국 물건을 사지 말자', '국산품을 애용하자', '인도인의 손으로 인도를 통치하자', '교육만이 힘이다'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결국 1911년 벵골 분할령은 폐지되었지만, 종교 간 갈등을 일으키려 했던 영국의 속셈은 오랫동안 인도 사람들 가슴속에 남았다.

 

 

힌두교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교의 무함마드 알리지나가 이끄는 전인도이슬람연맹이 일치 단결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수의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의 지배에서 벗어나 따로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 했다. 영국은 내전과 분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국민회의파도 종교갈등과 이로 인한 살육행위를 마냥 모른 체할 수 만은 없었다.

 

Mohammad Ali Jinnah and Mohandas Gandhi in 1944.

 

결국 1947 6 3,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 1900-1979) 인도 총독이 영국령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분리독립안을 발표했다. 간디는인도를 생체 해부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 1900-1979)

 

8 15,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가 분리 독립됐지만 이 과정에서 또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쫓겨나면서 14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100만 명이 살해된 것이다.

 


Jawaharlal Nehru salutes as he is sworn in as India's first Prime Minister at an August 15th, 1947, ceremony at Delhi's Red Fort.

Jinnah in Karachi, 1947.

 

분리 후에도 양국은 경계지역인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3차례나 전쟁(Kashmir Conflict)을 치렀지만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면적은 22만여㎢로 한반도와 비슷하다. 인구는 카슈미르 서쪽지역인 파키스탄령 카슈미르가 380만명, 인도령 카슈미르(인도에선 잠무-카슈미르주로 칭함) 820만명 가량이다. 인구의 대다수는 무슬림이고 힌두교 신자가 소수다.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카슈미르는 수많은 외침으로 안정적 정권을 유지한 시기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1586년 무굴제국에 복속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독립을 유지했다. 이후 카슈미르는 시크교도 통치를 거쳐 인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영국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카슈미르는 1947년 영국 식민지배에서 파키스탄과 인도가 각각 분리할 즈음 운명의 갈림길에 선다. 파키스탄이나 인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카슈미르에선 인도 국민회의당의 자와하를랄 네루가 주창하는 세속주의에 동조해온 지도자 셰이크 압둘라가 득세한 상황이었다. 세속주의는 종교공동체 주의를 거부하고 남녀평등 등 세속적 가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 때문에 나라가 쪼개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압둘라 때문에 카슈미르가 인도로 넘어갈 처지에 놓이자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의 논리는 카슈미르가 지정학적, 언어학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파키스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당연히 파키스탄에 편입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연맹은 파키스탄 북서변경 지역에 거주하는 호전적인 파탄족을 동원, 1947 7월 카슈미르를 전격 침범했다. 파탄족이 카슈미르 수도인 스리나가르 점령을 시도하자 인도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Muslim refugees attempt to flee the New Delhi area by train in September 1947. In total, as many as 9 million Muslims would migrate from India to Pakistan in the aftermath of partition.

Sikh refugees from the Pakistani side of the Punjab. Researchers estimate that over 5 million people, most of them Hindus and Sikhs, migrated from Pakistan to India in the years immediately following partition.

Partition in India. September 1947. Moslems waiting to leave for Pakistan as they seek protected transport to Dot Purana Qila, an ancient fort in Pakistan 

Indo-Pakistani War of 1947

Armed tribesmen in Kashmir during the 1947 Indo-Pakistani War.

 

파키스탄과 인도가 영국 식민지배에서 각각 독립하면서 발발한 카슈미르 전쟁(or Indo-Pakistani War of 1947) 1949 1월까지 1 6개월간 지속됐다. 결국 유엔이 나서 정전을 중재, 카슈미르를 동서로 나누는 현재의 통제선(LoC)을 두게 됐다. 양국은 이후에도 1965년에도 카슈미르 영유권을 놓고 5일간 전쟁을 치렀다.

 

1965 Indo-Pak War Memorabilia – 25 Indian Artillery guns captured in Chhamb Sector

Pakistan Patton tanks captured by India during the 1965 war.

 

1971년에는 다른 문제로 전쟁을 겪었다. 당시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이 서파키스탄(파키스탄)에 불만을 품고 독립하려 하자 인도가 동파키스탄 편을 들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간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양국은 카슈미르 지역과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맞붙었다.

 

1947, 파키스탄은 처음에는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된 형태로 독립했는데, 이는 벵골 분할령 때문이었다. , 서파키스탄은 지리적으로 1,600km나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언어도 문자도 민족도 풍습도 모두 달랐다. 게다가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훨씬 더 많았지만, 정치는 서파키스탄을 중심으로 이루어다. 정부의 예산도 서파키스탄 중심으로 쓰였고,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공무원이 돼도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 정도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이 밖에도 불편한 점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에 또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물론 파키스탄과 인도 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1952년 서파키스탄은 오직 우르두어만을 공식 표준어로 지정했다. 벵골어를 쓰던 동파키스탄에선 대학생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서 벵골어도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벵골 지역의 동파키스탄인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Female students of Dacca university marching on Language Movement Day, 21 February 1953.

 

이에 동파키스탄은 독립을 요구했고, 이에 반대하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1971 3 25일 밤에 서파키스탄 군대가 동파키스탄을 공격하면서 전쟁(Bangladesh Liberation War)은 시작되었다. 9개월간 지속된 전쟁에서 약 300만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하였고, 집단학살(Genocidal Campaign)의 일환인 집단 강간(Genocidal Rape) 20만에서 40만의 동파키스탄 여성들이 강간 후 학살을 당하였다. 소위 전쟁의 한 수단으로 자행된 Genocidal Rape는 방글라데쉬 독립전쟁 이외에도 유고슬라비아 전쟁, 르완다 대학살 그리고 일본의 난징대학살 등에서 체계적이면 목적적으로 자행되었다.

 




 

결국 1971 12 16일 서파키스탄이 항복문서에 서명함에 따라 인도의 지원을 받은 동파키스탄은 전쟁에 승리하였다. 그리고벵골의 나라를 뜻하는 방글라데시(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로 국명을 바꿔 독립했다. 현재도 인도에서는 다수의 힌두교도들과 소수의 이슬람교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2008년 인도의 뭄바이에서 발생한 테러는 이슬람 세력인 파키스탄의 무장 단체에 의한 것이었다.

 

Signing of Pakistani Instrument of Surrender by Pakistan's Lt.Gen. A. A. K. Niazi in the presence of Indian military officers in Dhaka on 16 Dec'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