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3일

6.3항쟁(학생시위 격화-계엄령 선포)

산풀내음 2017. 4. 30. 02:20

19646 3,

6.3항쟁(학생시위 격화-계엄령 선포)

 

1950 6 25일 대한민국에서 남북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은 한국의 배후기지가 되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였기에 양국의 수교를 주선하게 된다. 1951 1021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1952 2 15일 동경에서 제1차 한일회담이 열렸다. 한국은 재일교포의 영주권 문제, 강제퇴거 문제, 생활보호 문제에 있어서 특별한 대우를 요구했고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정신적, 물질적 보상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겨 놓은 재산 반환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결렬되었다.

 

1953 4월 제 2차 한일회담이 열렸지만, 성과 없이 끝나고 만다. 한국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문서로 만들고 발표할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같은 해 10 15일에 제 3차 한일회담이 개최되었고, 이번에도 일본은 자국민의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 한국은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청했고 이에 대하여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 철도, 항만, 농지 조성 등 한국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구보다 망언이다. 한국은 망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1958 8, 일본에서 북송운동이 일어났고, 한국정부는 이에 대하여 제동을 걸고자 했지만, 결국 195912 14975명을 태운 선박이 니가타항을 출발해 북한으로 떠나게 된다. 이후 1984년까지 186차에 걸쳐 북송사업이란 이름으로 북송선을 탄 사람은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북송사업은 일본 정부가 범죄율이 높고 경제력이 약한 자이니치(재일조선인)에 대한 지원 경비를 줄이기 위한 차원에서 실시됐으며 이는 이후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인권 문제로 비화했다. 일본은 특히 당시 북한으로 건너간 자이니치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했던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반일 운동은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됐다. 사진은 1959 2 1, 재일 교포 북송 반대 차량 시위 모습

북으로 가는 재일교포들

 

1960 4.19혁명이 일어나고 그 해 10월에 5차 회담이 열렸다. 당시 일본은 한국이라는 시장이 필요했고 우리는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1961 11월 제6차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그리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는 1961 11 일본을 비공식 방문하여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와 함께 4억 달러를 요구한다. 그러나 일본의 거부로 끝이 났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1961 7월 정착성 예금의 금리 인상, 8월의 중소기업은행 설립, 1962 2월 국민저축조합법 제정, 6월의 통화개혁 등을 통해 국내 자금을 동원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내자금 조달은 실패했고 실업은 증가했다. 1962년∼64년에 이르는 기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5.6퍼센트 감소했다. 원조 감소와 수출 부진으로 인한 만성적인 외화 부족, 곡가파동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물가 상승 때문에 경제는 전반적인 침체 국면에 빠져들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 113일 서울에서 스기 미치스케(杉道助) 6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를 맞이하고 있다. 스기는 정한론(征韓論)의 원조로 통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조카 아들로 일본 관서지역 재계의 거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2 11월에 열린 제 7차 회담에서 김종필은 무상원조 3, 유상원조 2억 그리고 민간차관 1억 달러의 합의를 이끌어 낸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는 김종필-오히라 메모이고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5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 5(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민간 차관).

 

1962 11월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왼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청구권 문제 등 한일관계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오히라는 이후 중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했고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 총리가 된다.

 

1964년 봄김종필-오히라 메모가 폭로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시위가 절정에 달했고, 윤보선, 장택상, 유진오, 장준하 등에 의해 주도되는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되었으며 이는 학생운동을 지원, 고무, 독려하였다.

 

1964 3 24, 서울대 문리대생 500여명이 거리로 진출하였고,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과 정경대 학생회장 박정훈 등이 이끈 고대생들은 안암동에서 출정하여 국회의사당(당시에는 국회의사당이 서울시청 건너 편 서울시 의회 건물에 위치)에서 우리는 종주국 없이 한번 살아보자. 이것이 우리의 피맺힌 절규다. 일제의 망령을 박멸할 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투쟁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여기서 엄숙히 선언한다.”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시위는 계속됐다. 26일에는 전국적으로 6만여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청와대 주변은 전기철조망으로 바리케이드가 처졌다. 학생들이 내건 최초의 요구는 단순한 민족주의적 요구였다. 정부의 굴욕적이고 저자세로 일관한 외교 태도를 문제 삼았다. “민족적 자존심을 3억 달러에 팔아넘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정당한 감정이었다. 일본은 과거 식민지배를 사과하는 그 어떠한 표현도 협정 내용에 포함되는 것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식민지배를 합리화했다.

 

3 30일 박정희는 각 대학의 학생회 대표를 불러 면담하는 등 초기에 정부는 유화적인 태도로 사태확산을 막아보려 했지만 학생들이 단식농성 등 강도를 점차 높여나가자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시위가 확대되면서 학생들도 급진화했다. 이들은 “매판자본을 국가가 몰수해 민족자본화”하는 것으로 경제를 재건하라고 주장했다. 5월 혁명의 자랑은 4월 혁명의 모독이다” “5·16 4·19의 연장일 수 없다”는 구호가 등장했다.

 

한일 회담 반대 시위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 (1964 3 24일 자).

 

정부의 강경 대응에 맞서 학생들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5 20일 학생들은 ‘(박정희식)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박정희 정권을 이렇게 규정했다.

5월 군부쿠데타는 4월의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경제적 민족자립을 외치는 정부는 노동자·농민의 소비대중에 실업, 기아임금, 살인적 고물가를 선물하면서, 매판적 반민족 자본의 비만을 후원했다.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 타도” “배고파서 못 살겠다. 매판 자본 잡아먹자” “Yankee Keep Silent” 같은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6월 2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 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데모를 주도하자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 항쟁이 벌어졌다. 6초 공화당 김종필 의장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 3일 정오를 기해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이던 법대 학생회장 김재하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 이경우(법대), 박정훈(정경대), 이명박(상대) 등의 주도하에 , 연세대, 서울대생과 함께 서울 18개 대학 15천여 명 등 총 3만 명 가량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곳곳에서 파출소가 공격 당했고, 경찰 저지선은 청와대 코 앞까지 밀리기도 했다.

 





 

4·19를 방불케 하자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후 940, 마침내 오후 8시를 기점으로 한 계엄령이 서울시 전역에 선포됐다. 계엄은 55일 뒤인 7 29일에 해제됐지만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 120명이 검거되었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이때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세대를 학생운동사에선 `6·3세대`라고 부른다.

 






이명박도 한 때는 바른 생각을 할 줄 알았던 듯

 

1964 12월에 7차 회담이 열렸고 결국 1965 6 22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한다. 당시 4가지 부속협정에도 사인하는데 오히려 핵심은 이후 깊은 상처를 남기는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1965 6 22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한다. 당시 4가지 부속협정에도 사인하는데 오히려 핵심은 이후 깊은 상처를 남기는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1965 6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에 대한 조인식이 있은 뒤 서울효창공원에서 반대집회가 열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5 12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조약 비준서에 서명하는 것을 정일권 국무총리, 이동원 외무 장관, 김동조 한일 회담 수석 대표가 지켜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