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3일

싱가포르, 영연방자치국 독립선언

산풀내음 2017. 4. 30. 02:07

1959 6 3,

싱가포르, 영연방자치국 독립선언

 

 

1959 6 3일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 받은 싱가포르가 새 헌법의 공포와 함께 영국의 자치령이 됨으로써 140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다. 민족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싱가포르 최초의 총선이 열렸다. 인민행동당(PAP)이 다수 의석인 43석을 차지하고, 리콴유(Lee Kuan Yew, 1923-2015)가 최초의 싱가포르 총리가 되었다.

 

Lee Kuan Yew

 

싱가포르의 초기 역사 기록은 시간의 안개 속에 갇혀 있지만, 3세기경 중국 문헌을 보면반도 끝에 있는 섬이라는 뜻의푸루오충(Pu-luo-chung)”으로 싱가포르를 부르고 있다. 훗날 이 도시는바다 마을이라는 뜻의테마섹(Temasek)”으로 불렸는데, 첫 번째 정착지 테마섹이 세워진 이 때가 서기 1298~1299년이다.

 

14세기, 작지만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한 이 섬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전설에 따르면,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의 수도 팔렘방(Palembang)에서 온 상 닐라 우타마(Sang Nila Utama) 왕자가 사냥을 나왔다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동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를 좋은 징조로 생각한 왕자는 그 동물을 발견한 자리에 도시를 세우고사자의 도시라며싱가푸라(Singapura)”라고 이름을 붙였다. 산스크리트어로심하(simha)”사자, “푸라(pura)”도시를 뜻한다.

 

당시 이 도시는 고대 싱가푸라 다섯 왕들의 지배를 받았다. 여러 해로가 자연적으로 만나는 곳인 말레이 반도 끝에 자리한 이 도시는 중국 정크선, 인도 선박, 아랍의 다우선, 포르투갈 전함, 부기스 족의 스쿠너 등 다양한 선박이 모이는 교역소로 번성했다.

 

싱가포르 역사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시기가 19세기인데, 바로 이 때 지금의 싱가포르가 세워졌다. 당시 싱가포르는 이미 말라카 해협의 떠오르는 교역소였고, 영국은 이 지역에 기항지가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영국 상인들은 발전하는 대영제국의 상선을 보호하고 물품을 공급하는 동시에 이 지역에서의 네덜란드 세력의 팽창을 선제할 전략적 요충지가 필요했다.

 

수마트라에 있는 벵쿨렌(지금의 벵쿨루)의 당시 부총독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즈 경(Sir Thomas Stamford Raffles)은 인근 섬들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1819 1 29일 싱가포르 섬에 상륙했다. 습지로 덮인 이 섬의 엄청난 잠재력을 알아챈 그는, 지역 군주들과의 조약 협상을 도와 싱가포르를 교역소로 정했다. 곧이어, 싱가포르의 이러한 자유 무역 정책은 아시아 지역 전체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미국, 중동의 상인들까지 끌어 들였다.

 

1832, 싱가포르는 페낭(Penang), 말라카(Malacca), 싱가포르로 구성된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의 중심지가 된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전신과 증기선이 도래하면서, 싱가포르는 1873년에서 1913년 시기에 걸쳐 동서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더욱 크게 담당하게 되었다. 1819년 불과 150명이었던 싱가포르의 인구는 1860년에 이르러 80,792명으로 늘어났으며, 주로 중국인, 인도인, 말레이인이었다.

 

하지만 평화와 번성을 구가하던 싱가포르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 12 8일 일본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한 때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졌던 싱가포르는 1942 2 15일 일본의 침략에 무너졌다. 이후 3년 반 동안 이 지역은 일본인들이 점령했다. 1945, 일본이 항복하자 싱가포르는 영국 군정에 넘겨졌고, 페낭, 멜라카, 싱가포르로 구성된 해협식민지가 해체될 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었다. 1946 4, 싱가포르는 영국 왕의 직할 식민지(Crown Colony)가 되었다.

 

1959, 민족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싱가포르 최초의 총선이 열렸다. 인민행동당(PAP)이 다수 의석인 43석을 차지하고, 리콴유(Lee Kuan Yew)가 최초의 싱가포르 총리가 되었다. 1961, 좀 더 긴밀한 상호 발전을 위해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 사라왁, 북 보르네오와 브루나이 연방에 합병을 제안했고, 1962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민투표에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뒤이어,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사라왁-북 보르네오(지금의 사바 주) 연방과의 합병을 거쳐 1963년 말레이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합병의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나지 않은 1965 8 9,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된 자주독립 민주국가가 되었다.

 

Then-Prime Minister Lee Kuan Yew announcing Singapore’s separation from Malaysia during a press conference on Aug 9, 1965. Earlier that day, the Proclamation of Independence was read on radio. 

 

독립 당시 인구는 160만 명이었으나, 꾸준히 늘어 2010년에는 520만 명에 이르렀다. 20세기 후반에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중 하나로, 싱가포르 항구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항구 중 하나이며, 정유시설과 금융산업은 세계에서 각각 3, 4번째로 크다. 싱가포르의 면적은 7197㎢로 한국서울 (605.25) 보다 조금 넓고, 인구는 서울의 절반 정도인 567만 명(2015 말 기준)이다. 중국 74%, 말레이 13%, 인도 9.1%, 기타 3.3%로 중국계 화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6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레이시아조호르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북쪽은 조호르-싱가포르 코즈웨이를 통해, 서쪽은 투아스 제2 연결점에 연결되어 있다. 주롱 , 풀라우 트콩, 풀라우 우빈, 센토사가 주요 섬이며, 가장 높은 산은 부킷 티마 로 해발 166미터이다.

 

기후는 연중 고르게 아침 최저 23℃에서 낮 최고 32℃의 열대 우림 기후를 보인다. 연평균 강수량은 2343.1 mm 정도이며 11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헌법상 공용어는 영어, 표준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이다. 헌법에는 말레이어를 또한 단독 국어(national language)로 지정하고 있는데 말레이어의 표기 문자가 로마자(Roman script)로 적어야 한다고 까지 세밀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1언어 역할을 영어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