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2일

독일, 소련에 선전포고

산풀내음 2017. 5. 13. 23:13

1941 6 22,

독일, 소련에 선전포고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어마어마한 전쟁보상금을 갚아야 했다. 이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세계대공황의 여파를 타고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된 아돌프 히틀러는 세계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1938 3,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침략, 점령하였고 나아가 9월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점령하였다. 1939년 체코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을 병합하는 등 침략을 통한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이런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과 군사 동맹을 제안하지만 소련은 오히려 독일과 1939 8 23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서명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도 부른다.

 

독소불가침조약문에 서명하고 있는 소련 외무부 장관 몰로토프. 서 있는 사람 중 왼쪽에서 셋째가 독일 외무부 장관 리벤트롭, 넷째가 스탈린이다.

 

1939 9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를 계기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소련도 917일 폴란드 침공하였고, 이 전역은 1939 10 16일 독일과 소련간 독일-소련 협력, 우호 경계 조약을 맺고 폴란드 전체 점령에 합의하며 끝났다.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분할 점령되었고, 그제야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40 4월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략, 점령하였고 벨기에와 네들란드도 연속해 점령하였다. 1940 6월에는 프랑스 파리도 점령했다. 사를 드골은 영국으로 건너가 프랑스에 남아 있는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며 독일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1940 8월에는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영국은 미리 개발해 놓은 레이더를 이용해 독일 전투기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폴란드 침공 후 악수를 나누는 독일 장교와 소련 장교

 

1939 9 1일부터 6년간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역(戰域)은 연합국과 추축국이 맞선 유럽ㆍ지중해 전역과 연합국과 일본군이 맞선 동아시아ㆍ태평양 전역으로 양분된다. 유럽 전역은 다시 영미군이 독일ㆍ이탈리아와 대적하는 서부전선(Western Front)과 소련군이 독일군과 대적하는 동부전선(Eastern Front)으로 나뉜다.

 

이 중 가장 잘알려진 그리고 회자되는 것은 유럽의 서부전선이지만, 실질적으로 육상전투가 치열했던 곳은 독일과 소련의 동부전선이었다. 사실 서부전선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된 1940 6월부터 1944 6 6일 노르망디 상륙(Normandy Landings)가 있을 때까지 의미있는 지상전은 거의 없었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는 선단을 공격하는 독일 잠수함과 영국 해상함대가 대서양에서 벌이는 대결은 영국의 입장에서야 사활이 걸렸을지 몰라도 대전의 흐름을 결정하는 결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치열한 접전이 일어난 곳은 동부전선이었다. 유럽 문화의 자존심 파리를 점령하고 영국 공습까지 감행하였지만 히틀러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련이었다.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은 1939년 독일-소련 상호 불가침조약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었지만 ‘적과의 동침’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영국, 지중해, 중동 사막 등지에서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히틀러는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수립했다. 바르바로사는 붉은 수염이라는 뜻으로 동방개척에 관심이 많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 소련은 당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서 앞선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했다.

 

히틀러의 목표는 공산주의자의 제거와 더불어 소련 남부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돈 강 일대의 산업지대, 유전이 있는 카프카스 지역으로 진출해 경제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예상했던 것보다 영국의 강한 저항에 접하면서 히틀러는 당초에 계획한 것보다 2년을 앞당겨 소련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한편 당시 소련은 독일이 프랑스, 영국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핀란드 일부(1939 12- 1940 3)와 발트 3(발트 해 동쪽에 있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병합(1940 6)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1941 622일 새벽, 히틀러는 300만 병력의 독일군을 앞세워 소련을 침공했다. 육전사상 최대규모였다. 히틀러는 129년 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그 날을 선택했다. 나폴레옹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내겠다는 히틀러의 야심찬 도전이었다. 독일군은 전차 3300, 중포 7000문으로 무장하고 2000대의 항공기를 투입해, 개전 첫날 소련의 항공기 1200대를 파괴했다.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우크라이나를 목표로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작전을 수행했다. 역사상 최강전력의 공격에 소련군은 혼란에 빠졌다. 오후 1215분경 비로소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이 라디오로 독일군의 침공사실을 소련 국민에게 알렸다. 소련군은 독일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6개월 동안 4백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1941년 진격하는 독일군




Cities and villages burn as Stalin decides on the "Scorched Earth Policy." "Where the Germans want oilfields, they will meet burning rigs.

 

독일이 러시아 서부를 공격할 것이라는 여러 정황을 포착했으면서도 혹시나 했던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독일의 선제공격에 당황했지만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발트해지역과 레닌그라드 점령이 목표였던 북부집단군은 1941 8월까지 레닌그라드 남부 주변까지 진군했으나, 맹렬한 소련군의 저항에 저지당했다. 이에 독일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봉쇄(Siege of Leningrad)하였다. 레닌그라드 점령은 바르바로사 작전 3가지 목표 중 하나였고 북부 집단군의 주요 목표였다. 레닌그라드의 전략적 가치는 옛 러시아 수도로서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인 장소였고, 소련 발트 함대의 주요 거점으로 군사적 중요도가 높았으며 산업 시설과 무기 공장이 모인 대도시였다.

 

포위전은 1941 9 8일 마지막 육상 연결 통로가 끊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이 1943 1 18일 도시로 연결되는 작은 회랑 부분을 해방하지만, 완전한 포위전 종료는 전투 시작 872일 만인 1944 1 27일 끝났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길었고 파괴적인 포위전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은 사상자인 약 3백만명의 사상자를 입은 도시 전투로 꼽힌다.

 

This photo, taken in the winter months of 1942, shows citizens of Leningrad as they dip for water from a broken main, during the nearly 900-day siege of the Russian city by German invaders. Unable to capture the Leningrad (today known as Saint Petersburg), the Germans cut it off from the world, disrupting utilities and shelling the city heavily for more than two years. (AP Photo)

A street after a German artillery raid during the Siege of Leningrad, Russia

레닌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두 소녀가 총을 집고 있다.

 

한편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나폴레옹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던 춥고 긴 소련의 겨울 앞에 히틀러의 독일군 역시 무력했다. 가을철 폭우로 노면이 진흙탕이 되자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기동성은 떨어졌고,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기후 앞에 전력은 쇠퇴해갔다.

 

1941 11 27일 혹한 속에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독일군. 이런 열악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독일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출처: Bundesarchiv>

독일 제4기갑군은 모스크바로 향한 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소련군의 저항보다 매서운 혹한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출처: Bundesarchiv>

히틀러는 현지를 사수하라고 명령하였지만 지치고 혹한에 노출된 최전선의 독일 병사들이 버틸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194112월 동상에 걸린 13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결국 도망가거나 항복하는 것 외에 지치고 추위에 얼어붙어 있던 독일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는 이러한 일선의 상황을 총통에게 보고하면서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후퇴를 건의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과연 100킬로미터를 후퇴하면 그곳은 따뜻하단 말인가?”라며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히틀러는 작전상 불가피한 후퇴를 패배와 동일시하기 시작하였다. 12 15, 그나마 히틀러와 말이 통했던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작전부장 요들(Alfred Jodl)이 제한적인 철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단지 북부집단군이 볼호프(Volkhov) 강까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결국 병력 분산과 보급품 수송의 어려움, 다른 전선에서의 변수 등으로 인해 결국 독일군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일 혹한이 이어지던 1941 12월 모스크바를 방어하기 위해 전선으로 투입되는 소련 증원부대.

Abandoned house in the outskirts of the besieged city of Leningrad, a rifleman of the Red Army aims and fires his machine gun at German positions on December 16, 1942.

 

1941년 겨울부터 붕괴되기 시작한 독일군은 1942 8월 21부터 1943 2월 2까지의 스탈린그라드 전투(Stalingrad Battle) 이후 동부유럽 전선의 주도권은 소련에 넘어갔다. 스탈린그라드의 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로 러시아 볼가 강 서안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이 전투는 제2 세계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약 200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인간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는 독일 제6군과 다른 추축국 군대의 스탈린그라드 포위와 이후의 소련군의 반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In October of 1942, a German Junkers Ju 87 "Stuka" dive bomber attacks during the Battle of Stalingrad.

Since the Germans weren't used to the harsh Russian winters, the Soviets used the weather to their advantage

 

게다가 1943년 사상 최대의 기갑전인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은 대승을 거두었다. 한편 1944 6 6일 서부전선에서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동부전선에서는 1944 6 22일부터 8 19일까지 소련군이 수행한 바그라티온 작전(Operatsiya Bagration)이 전개되었다. 북으로는 발트해에서 남으로는 흑해까지 1,000㎞에 걸친 전선에서 소련군 240만명이 독일군 중앙집단군 120만명을 들이쳐 700㎞를 전진했다. 스몰렌스크에서 폴란드의 바르샤바 코 앞까지 성큼 다가선 셈이다. 이로써 스탈린은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틀어쥐었다.

 

Panther on the Eastern Front, June 21, 1944

A German motorized artillery column crossing the Don river by means of a pontoon bridge on July 31, 1942. Wrecked equipment and materiel of all kinds lies strewn around as the crossing is made.

 

2차 세계대전 동안 전투 중에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힌 독일군인의 수가 1,350만명인데, 이 가운데 80%에 해당하는 1,000만명이 동부전선에서 나온 피해였다. 소련 860, 독일 325, 일본 120, 이탈리아 33, 영국 32, 미국 26만이라는 전사자 수만 따져보더라도 각 교전국의 피해 정도가 드러난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유럽에서 전사한 미군은 10만명인데, 1945 4월 전쟁의 막바지에 베를린 점령하는 작전에서만 소련군 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After having occupied a village on the Leningrad sector in 1942, Soviet forces discovered 38 bodies of Soviet soldiers that had been taken prisoner by the Germans and apparently tortured to death.

German prisoners march to Moscow after defeat at Belarus during "Operation Bagration", 17 July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