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조인(한일국교 정상화)

산풀내음 2017. 5. 13. 23:18

1965 6 22,

한일기본조약 조인(한일국교 정상화)

 

한국과 일본간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이 1965 6 22일 일본 수상관저에서 조인됐다. 조약은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수석대표와 시나 일본 외무장관, 일본 수석대표가 서명-조인했다. 일본자본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추진하고 정권을 강화하려는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진출을 희망하는 일본자본, 그리고 극동지역에 반공 보루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65 6 22일 일본 수상관저에서 거행된 한일협정 조인식. 이 조인식에서 양국 외상은 한일기본조약 등 29건의 관계문서에 서명했다.

 

기본조약으로 한일 양국은 외교-영사관계를 개설하고 한일합병 및 그 이전에 양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하였으며 일본측은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했다. 부속협정에서는 대일 청구권문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와 대우, 어업권문제 등을 합의했다. 특히 3억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공여하기로 합의했다.

 

자유당 정권 시절인 1952 2월 시작된 한-일 회담은 민주당 정권을 거쳐 13 4개월뒤인 1965 6월 공화당 정권에서 마무리됐다. 애초 한국은 1951 8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태평양 전쟁 승전국) 자격을 얻어 대일 전쟁 배상 요구가 가능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1952 214일 제1차 한-일 회담이 열렸으나 분위기는 차가웠다. 1차 회담에서 한국은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을 제시했지만 일본은우리도 받을게 있다며 한국에 남아있는 일본인 재산청구권을 주장하는 맞불 작전을 폈다.

 

이보다 앞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 10 20일 한·일 간 국교정상화를 위한 첫번째 예비회담에서 한국 측 양유찬 주미대사가 "오랜 원한을 잊고 화해하자"고 하자 일본 측 지바 교체수석대사가 "화해할 것이 무엇이냐"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일회담에 나온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아무런 반성과 죄의식 없이 협상에 임했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삐걱거리던 협상은 1953 10153차회담에서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의 망언으로 깨졌다. 구보타는 “일본 측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민둥산을 푸르게 만들었고, 철도를 깔았고, 수전(水田)을 늘리는 등 많은 은혜를 한국인에게 베풀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한국 측은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다”고 맞섰다. 구보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일본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구보타의 잇단 망언으로 한일회담은 이후 46개월간 중단됐다. 구보타 개인은 끝내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담이 결렬되자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해 한국 내정에 개입할 것을 일본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결국 한일회담은 1957년 말 일본이 미국 측의 강화조약 해석과 중재활동을 매개로 ‘구보타 발언’을 취소하고 역청구권을 포기한다고 약속함으로써 재개됐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구보타

 

박정희 군사정부는 한--일 동맹 강화를 염두에 두고 1961 10월 제6차 한-일 회담을 시작했다. 1961 1122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도쿄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회담해 조속한 시일 안에 국교정상화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청구권 금액을 두고 다투던 양쪽은 1962 1020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을 만나 이른바-오히라메모에 합의했다. 당시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완용이 되겠다고 호언했던 김종필씨가 개별 청구권을 포기하는정치적 타결을 한 것이다.

 

6차회담은 굴욕 회담 중단을 중단을 요구하는 국내 시위 격화(1964 6·3사태)로 또다시 멈췄다. 비상계엄으로 반대시위를 진압한 박정희 정권은 1964 12 3 7차 회담을 개최했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이 1965 2월 서울에서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가조인함으로써 고비를 넘긴 한-일 회담은 1965 622일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외상이 도쿄 일본총리 관저에서한일협정에 서명해 종지부를 찍었다.

 

한일협정 50주년 끝나지 않은 3가지 과제’, 경향신문 2015 61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131254561&code=940100

 

1965 6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에 대한 조인식이 있은 뒤 서울효창공원에서 반대집회가 열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5 12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조약 비준서에 서명하는 것을 정일권 국무총리, 이동원 외무 장관, 김동조 한일 회담 수석 대표가 지켜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