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5일

한국전쟁(6.25) 발발

산풀내음 2017. 5. 18. 20:30

1950 6 25,

한국전쟁(6.25) 발발

 

 

한국전쟁의 발발에서 휴전협정까지의 내용을 2회에 나누어 동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많이 시청해 주십시요

 

https://www.youtube.com/watch?v=0P51ff7_UGQ&t=121s

 

https://www.youtube.com/watch?v=_rrYDwGrNVs

 

 

해방정국에서 정치적기반이 확고하지 못했던 김일성은 이승만의 북진통일의지나 북한내부의 호전적 분위기 모두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자칫 미적거리면 내부의 정치적 도전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김일성에게 전쟁을 시작할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미군철수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무성은 극동국의 윌튼 버트워드를 통해서 1949년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했으므로 한국은 새로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남한을 장악하려는 북한을 중국이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분석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련은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정부를 파괴하기 위하여 가장 빠른 시기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음이 점점분명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육군성 차관 월리엄 드레이프 2세는군사적인 견지에서 보면 남한은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다. 이 곳에 미군을 남겨두면 분명히 문제가 일어난다. 더구나 1949년 이후 육군성은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데 필요한 예산조차 배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안보회의와 트루먼은 한 달 동안 조사를 한 뒤에 한국 내에 미군주둔을 반대하는 미군부의 견해에 찬성한다. 결국 1949 6 30일 소수의 미군고문관들과 신병보호병만 남기고 미군은 중요 군사장비와 함께 철수해버린다. 미군이 한국군에게 인계한 무기는 10만정의 소총과 5천만발의 소형화기탄약과 2천문의 로켓포, 4만대의 차량, 105미리 이하의 경포와 박격포 등이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의 날에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탱크와 비행기와 중형군함은 남겨두지 않았다.

 

이에 반해 북한군의 전쟁준비는 강화된다. 1949년과 1950년 초 한 달 사이에 스탈린은 3000명의 소련군장교와 사병을 북한군에 배치시켜 북한군을 지도하게 만든다. 반면 한국군에 배치된 미군 고문관은 500명 정도였다. 인민군 사단마다 15명의 소련군이 배치되었다. 소련은 중형탱크와 중포, 자동소총과 180대의 항공기를 인민군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1950년 봄 미정보기관이 탐지한 북한군의 병력은 135000명 정도였다. 이에 비해 남한군의 병력은 64697명에 불과했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북한군의 장비는 훨씬 우세했다. 특히 소련제 신형탱크는 전체 전선에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1949년 서울 풍경들 (윗 사진들)

 

 

북한군이 수도 서울을 침략하기 직전인 1950 6월에 AP Reporter에 의해 촬영된 서울 모습

 

1950 1 12일 애치슨 장관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를 방위선(defensive perimeter)에서 제외시킨다는 애치슨라인을 발표(Acheson Line Declaration)한다. 이제 북한인민군은 미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군은 떠났고 남한은 방위선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김일성이 남침 의지를 밝혔을 때 모택동과 스탈린은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거듭 충고한다. 그러나 중소 두 지도자 역시 미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도처의 공산혁명을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김일성의 개전의지를 만류하지는 않았다.

 

 

 

1949 3 4일 김일성이 스탈린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에게 남한의 침략 협의차 모스크바역에 도착 후 도착 성명 발표

 

마침내 1950 6 25일 새벽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 인민군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만에 대구, 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게 됐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하여 7 7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1950 9 15일 연합군은 더글러스 아더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9 28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10 13평양에 이어 10 26압록강 부근 초산까지 이르렀으나, 10 25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교전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1953 7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 1개월 2일 동안 지속된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군 사망자 13 8천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 9천 여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 8천 여명, 부상자 48만 여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 6천 여명, 중공군 사망자 13 6천 여명, 부상자 20 8천 여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 3천 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한국 전쟁은 그러나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던 전쟁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한국 국방부와 군사 편찬 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 5천 여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여명, 부상 23만 명, 납치 8 5천 여명, 행방불명 30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유족회와 학자들은 학살된 한국인만 1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 2천명, 실종자 79 6천 명 이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6.25 전쟁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남겼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전장에 몸을 던진 이름 없는 전사들

(출처, 세계일보 "전쟁은 끝아지 않았다. 6.25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2017년 6월 25일 기사 중에서 발췌)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6.25 당시 우리나라를 도왔던 수많은 외국 군인들 중에서도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다. 가난한 나라였고 한반도 정세에 개입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도 없었지만 유엔의 요청에 기꺼이 응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중순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는 유엔으로부터 한국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파병을 약속했다. 에티오피아는 다른 나라를 돕기에는 사정이 어려웠다.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한데다 전투를 할 수 있는 병력도 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았을 때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았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았던 에티오피아는 황실근위대에서 1000여명을 차출해 1개 대대를 구성, 한국에 파견하기로 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이 부대에 ‘격파하다’라는 뜻의 ‘강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951년 5월 6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1진은 2개월 동안 미군 교관들의 훈련을 받고 미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6.25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강원도 화천 북쪽 노동리에 배치된 이들은 전방에 배치된 지 3일 만에 중공군과 격전을 치렀다. 1952년 3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2진은 중부전선 삼각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웠고, 1953년 4월 16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3진은 휴전 때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한 참전용사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에티오피아는 참전용사들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1971년 쿠데타로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이유로 정치적 핍박을 받았다.

 

 

학업을 중단하고 펜 대신 총을 잡았던 학도의용군도 잊어서는 안 될 존재다. 육군군사연구소의 6.25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학도의용군의 시초는 1950년 6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학생들이 만든 ‘비상학도대’다. 이후 국방부 정훈국 지도 아래 대전에서 7월 4일 만들어진 ‘의용학도대’가 같은달 19일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통합되면서 학도의용군이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30만명이 참전했던 학도의용군 중 전사자는 7000여명.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숨졌다. 영화 <포화속으로>의 실제 사례로 알려진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 전투가 대표적인 학도병 참전 사례다.

 

 

 

 

 

 

MacArthur was appointed commander-in-chief of U.N. forces at the outset of the Korean War. However, he openly disagreed with official U.S. policy, and in April 1951, President Truman removed him from command, igniting a storm of controversy.

 

 

At the start of the Korean War, the P-51 Mustang was the primary aircraft of the United Nations forces. Within a few years, the Mustang and other World War II-era propeller planes had been superseded by a new breed of jet fighters.

 

 

American movie actress Marilyn Monroe entertains a group of soldiers in Korea.

 

 

Marilyn Monroe sings to U.S. Marines stationed in Korea after the Korean War. (1953. 7. 27)

 

 

Twenty-one American soldiers refused to return to America at the end of the Korean War. The sign on the truck reads: "We Stay for Peace." They moved to China; by the 1960s, all but two had returned home.

 

 

Dwight Eisenhower campaigned on a pledge to end the Korean War and traveled to the region shortly after his election in 1952.

 

 

A view from the bows of the USS Missouri as the main batteries (16-inch guns) fire on enemy targets off North Korea.

 

 

B-26 Invaders bomb logistics depots in Wonsan, North Korea, 1951

 

 

 

 

 

 

 

 

U.S. Air Force attacking railroads south of Wonsan on the eastern coast of North Korea

 

 

U.S. Marines attack Hagaru-ri, North Korea, in December 1950.

 

 

Korean War Series 1st Marine Div LVT Buffalo Haengju Crossing of Han river  1950. 9. 21.

 

 

 

북한 및 중공군들

 

 

 

이동 중인 북한군

 

 

Chinese volunteers crossing the Yalu River into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In October 1950, communist China entered the Korean conflict, sending thousands of soldiers across the Yalu River. The People's Volunteer Army, or PVA, won a series of victories, demoralizing U.N. troops and forcing them back across the 38th parallel into South Korea.

 

 

On September 15, 1950, General MacArthur launched a surprise amphibious assault at the port of Inchon, South Korea, resulting in a decisive U.N. victory over the invading North Koreans. Within weeks, U.N. and South Korean forces had captured Seoul and cut off vital North Korean supply lines.

 

After two years of negotiations, a ceasefire agreement was reached in July 1953. The Korean border remained near its prewar location along the 38th parallel, with a demilitarized zone (DMZ) formally separating North and South. No formal truce was ever signed.

 

 

 

피난민들

 

 

 

맥스 데스포의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들, 1950 12 4일 촬영. 이 사진으로 맥스 데스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중국 공산군대의 한국전쟁 개입과 유엔군의 1.4후퇴에 따라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들 - 1951 1 5일 서울

 

 

Koreans Fleeing Pyongyang braving the icy waters of the Taedong River. Photographed: December 10, 1950.

 

 

Child refugees during the Korean

 

 

 

 

 

 

 

전쟁의 결과황폐화된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