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5일

마이클 잭슨 심장마비 사망

산풀내음 2017. 5. 18. 20:41

2009 6 25,

마이클 잭슨 심장마비 사망

 

 

2009 625(현지시간), 전 세계인은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다. 팝의 역사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스타 마이클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 ~ 2009)이 쓰러진 것이다. 향년 51. CNN LA타임스, 티엠지닷컴(TMZ.com) 등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이날 낮 12시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현지소방서에 긴급구조를 요청했으나 사망했다.

 

이날 낮 12 21분쯤 911전화를 받고 출동한 긴급의료진이 마이클 잭슨 자택에 도착했을 당시 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였다. 의료진은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마이클 잭슨은 반응을 보이지 않아 UCLA 메디컬센터로 옮겨졌다. 미 소방당국은 마이클 잭슨이 이날 오후 2 26분쯤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다음 달 13일 영국 런던에서 컴백 콘서트 시리즈를 준비중이었다.

 

1958 8월 29 미국 인디애나 개리에서 마이클 잭슨이 태어났다. 1963 잭슨은 아버지에 의해 형제 잭키, 티토, 저메인이 결성했던 잭슨 브라더스 밴드에 합류했다. 1966 형 저메인과 함께 메인 보컬을 맡기 시작했고 밴드 이름을 잭슨 파이브로 바꿨다. 같은 해 메이저 지역 탤런트 쇼에서 제임스 브라운 ‘I Got You (I Feel Good)’를 불러 우승했다.

 

 

마이클 잭슨은 1971 '갓 투 비 데어'(Got To Be There)라는 음반을 시작으로 홀로서기 시작했으며 그의 솔로 전성 시대는 1982년 발매한 '스릴러'(Thriller) 음반에서 만개했다. 앨범 수록곡 9곡 중 7곡이 빌보드 차트 톱 10에 들었다. 특히 '빌리 진'의 뮤직비디오가 MTV로 공개되자 그의 '문워크 춤'은 전세계 음악팬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스릴러’앨범은 전세계적으로 약 6000만장이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3개 그래미 상 수상, 흑인 최초·최연소 뮤지션으로 음악잡지 ‘롤링스톤스’ 표지 장식, 75천만 장의 음반 판매고. 그의 음악적 성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1982년 뉴욕타임스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팝 음악계에는 두 종류의 가수가 있다. 마이클 잭슨과 마이클 잭슨이 아닌 가수.

 


 

마이클 잭슨의 사생활은 굴곡투성이였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 두 사람은 1994년 결혼했지만 ‘계약결혼’이란 루머에 시달리다가 19개월간의 짧은 결혼생활을 마감했다. 이혼 후 잭슨은 프레슬리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끔찍했다고 말했으며, ‘섹스리스 부부였다고 말한 적도 있다.

 

Michael Jackson & Lisa Marie Presley.

 

리사 마리는 남성 편력이 매우 강한 여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네 차례 결혼을 한 그녀는 슬하에 쌍둥이 딸을 포함해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1988년 뮤지션인 대니 코프와 처음 결혼식을 올렸던 그녀는 1994년 이혼한 후 20일 만에 마이클 잭슨과 결혼식을 올려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아동성추행 혐의로 괴로워하고 있던 잭슨의 곁을 지켜주었던 리사 마리는 잭슨이 결백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를 구해주고 싶었다. 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리사 마리에게 잭슨 역시 많이 의지했으며, 이렇게 사랑에 빠졌던 둘은 마침내 결혼식까지 올렸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96년 둘은 이혼했으며, 당시 이혼 사유에 대해서는타협할 수 없는 차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리사 마리의 세 번째 남편은 니컬러스 케이지였다. 2000년 만나 첫눈에 서로 사랑에 빠졌던 둘은 2002년 하와이에서 로맨틱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런 로맨스는 오래 가지 못했다. 결혼한 지 108일 만에 둘은 갈라서고 말았다. 2006년 음반 프로듀서이자 기타리스트인 마이클 록우드와 네 번째 결혼식을 올렸던 리사 마리는 지난 2010년 쌍둥이 딸을 얻었다.

 

잭슨은 이혼한 이듬해인 1996년 자신의 피부과 치료를 도운 간호사 데비 로와 재혼, 아들 프린스, 딸 패리스를 낳고 살다가 1999년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 셋째 프린스 마이클 주니어는 대리모를 통해 낳았다.

 

데비로우와의 결혼 생활중 생긴 프린스 마이클 주니어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그러나 생물학적 친자 여부는 아직 논란에 빠져 있다.

 

잭슨을 따라다닌 또 다른 루머는 박피설과 성형 중독설. 그동안 잭슨이 백인에 대한 동경 때문에 지속적으로 박피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 그는 백반증이라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1984년 ‘스릴러’로 활동할 당시 광고 촬영 중 폭죽사고로 화상을 입었고 그 후 백반증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 증세가 심해지자 잭슨은 흉한 피부를 가리기 위해 전신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피부에 치명적인 직사광선를 피하기 위해 외출할 때는 모자나 스카프로 얼굴을 가렸다.

 

아동성추행 루머도 말년의 잭슨을 비참하게 했던 원인. 잭슨은 2005년 병원비가 없어서 고통받는 게빈이라는 아이를 도와줬다가 그의 부모로부터 성추행범으로 몰렸다. 그러나 게빈의 어머니가 전과 8범의 상습적인 사기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잭슨은 재판에서 승소했다. 이에 앞서 잭슨은 1993년 당시 13세이던 소년 조단 챈들러를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피소를 당했다. 잭슨의 이미지를 치명적으로 손상시켰던 이 사건은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사망 직후 사건 당사자인 챈들러가 양심고백을 하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챈들러는 “당시 사건은 돈에 눈이 먼 아버지가 모두 꾸민 짓이었다”고 밝힌 것. 이로써 잭슨은 15년 넘게 자신을 괴롭히던 ‘아동성추행범’이라는 주홍글씨를 벗게 됐다.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다.

 

같은 해 8 25일 마이클 잭슨의 사망원인은 치사량의 마취제 성분으로 밝혀졌으며, 잭슨의 불면증 치료를 약 6주간 해왔으며 매일 밤 강력한 마취제인 프로포폴(propofol) 50㎎을 정맥에 주사한것으로 알려진 잭슨의 주치의인 콘래드 머레이(Conrad Murray)가 과실치사 혐의로 2011 12월 에 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마이클 잭슨에게 수면제를 과다 투여해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마이클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가 지난 2011 11월 열린 선고 공판에서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콘서트 준비로 불면증을 호소하던 잭슨은 자신에게 마취제를 투여해 줄 의사를 찾던 중 머레이 박사를 개인 주치의로 고용했다. 잭슨은 머레이 박사에게 유럽에서 이뤄질 한달간 콘서트를 위해 15만달러를 주기로 했었다. 머레이 박사는 콘서트 리허설을 강행하던 마이클 잭슨에게 6주 동안 매일 밤 프로포폴을 투여했다. 증언에 따르면 머레이 박사는 잭슨이 사망한 날 밤 안정수면제인 로라제팜과 미다조람, 신경안정제 바륨 등을 줬지만 잭슨이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호소하자 결국 25밀리그램의 프로포폴을 투여했다. 머레이 박사는 몇 분 후 잠이 든 잭슨이 안정됐다고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문제는 머레이 박사가 잭슨이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 상황이었다. 잭슨의 가정부들과 안전요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머레이 박사는 잭슨에게 이상을 감지하고서 당황하며 911응급센터에 전화도 걸지 않은 채 평평한 바닥이 아닌 물컹한 침대 위에서 잭슨에게 심폐소생술(CPR)을 시행했다. 잭슨의 안전요원은 "911에 신고하기 전 머레이 박사가 의약도구와 프로포폴을 투여한 정맥주사를 숨기기에 바빴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