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5일

이승만 처단 미수사건

산풀내음 2017. 5. 18. 20:36

1952 6 25,

이승만 처단 미수사건

 

6·25 전란이 한창이던 1952 625일 임시수도인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는 ‘6·25멸공통일의날’ 기념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이승만 대통령의 훈시 도중 단상 뒤 VIP석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 대통령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거리는 불과 3m 남짓, 하지만 탄환 불발로 저격은 실패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의열단(義烈團) 출신 유시태(1890~1965) 선생이었다.

 

살인마 이승만을 죽이기 위해 접근하는 유시태 의사

 

62세의 유시태 선생은 민주국민당 소속 김시현(1883~1966) 의원의 양복을 빌려 입고 김 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유시태와 김시현은 같은 경북 안동 출신이며 두 사람은 일제 때부터 의열단원으로 상하이를 비롯해 해외 각처에서 일본인들을 공격했다가 10여년의 옥고를 치렀던 애국지사들이었다. 유시태에 이어 그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 사실상 암살 사주 혐의로 김시현 의원 역시 체포됐다. 김시현은 6개월 전인 1951 12월에도 인천형무소장 최양옥에게 이대통령 저격을 제의한 혐의로 당국의 수사를 받은 바 있다.

 

이때 부산은 이승만이 재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하면서 정치파동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1952 525일 부산, 경남, 전남, 전북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심복인 원용덕을 직제에도 없는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헌병사령관이라는 자리에 앉혀 이 지역의 계엄업무를 총괄토록 했다. 다음 날인 5 26일에는 통근버스에 탄 국회의원들을 5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감금했다가 헌병대로 연행했다. 나아가 국회의원 10명을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한때 수사당국은 배후인물 김시현이 민주국민당 소속이었음을 이유로 민국당 고위층인 백남훈, 조병옥 등에게도 수사의 손길을 뻗쳐 정가를 더욱 긴장시켰다.

 

두 달 뒤인 8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저격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김시현은 사실심리에서 암살시도 동기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고 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 또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1891~1960, 전 국방장관)를 죽이기는커녕 되레 주일대사를 시키는 그런 대통령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김시현은 자신은 30년간 조국광복을 위해 살인, 파괴를 해 온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70세의 노인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정한 기력으로 명쾌하게 응수했다고 전한다.

 

유시태는 법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권총 탄환을 일부러 물수건에 적셔 두었다가 불발탄으로 만들었다”고 진술, 살해의사가 없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4·19혁명 이후 석방될 때는 “그때 권총이 발사되기만 했더라면 이번에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1953 12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1960년 ‘4·19 혁명’ 후 과도정부에서 국사범 제1호로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