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8일

미 동성애자 스톤월 폭동(Stonewall Riots)

산풀내음 2017. 5. 21. 17:03

1969 6 28,

미 동성애자 스톤월 폭동(Stonewall Riots)

 

제 2 세계 대전에서의 혼란 속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전쟁 전에 지켜왔던 질서를 복원하고 변화의 힘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되었다.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와 함께 등장한 메카시즘은 공직사회에서 공산당원이나 아나키스트 등을 색출하기 시작했고 동성애자는 공산주의자만큼 위험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피해는 동성애자들에게도 무자비하게 확산되었다. ‘성도착자들은 대부분 감정이 불안정하고 윤리의식이 부족해 간첩의 회유나 협박에 넘어가 쉽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1947 1950년 사이, 동성애자에 대한 1,700개의 일자리 신청은 거부되었고, 4,380명이 군에서 해임되었으며, 동성애자로 의심 받는 420명은 정부의 직업에서 해고당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연방수사국(FBI)과 주 경찰은 동성애자로 알려진 사람들과 그들이 누리고 있는 제도, 그들의 지인들의 목록까지 보유하고 있었고, 미국의 우체국은 동성애에 관한 자료가 발송된 주소를 기록하였다.

 

미국의 동성애자들이 본격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한 것은 1950년대였다. 당시 공산당원이었던 해리헤이(Harry Hay)는 공산당이 동성애를 불건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불건전한 생활방식으로 간주한 상황에서 쉽게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여하튼 그는 LA의 남자친구들과 함께1950년에 메타친 소사이어티(Mattachine Society)’를 설립하였고 함정수사로 인해 희생양이 된 동성애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동성애자들을 교정하여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게끔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메타친 소사이어티 등장한 시기와 비슷하게 1955년 센프란시스코에서 빌리티스의 딸들(Daughters of Bilitis)’이라는 조직도 등장하였는데, 이념에선 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이 펴낸 잡지 래더(Ladder)’는 회원들에게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키우지 말 것’과 ‘표면적인 준수’를 내보일 것을 주장했다.

 

Members of the Mattachine Society in a rare group photograph. Pictured are Harry Hay (upper left), then (lr) Konrad Stevens, Dale Jennings, Rudi Gernreich, Stan Witt, Bob Hull, Chuck Rowland (in glasses), Paul Bernard. Photo by James Gruber.

Daughters of Bilistis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과 다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워싱턴 DC의 메타친 소사이어티의 설립자인 프랭크 카메니는 자신의 의사를 시위라는 방식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일하는 직장(Amry Map Service)에서 해고되었고 복직을 위해 싸웠다. 카메니는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메타친협회 회원들과도 논쟁했다. 당시 공민권 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65년 백악관 앞이나 또 다른 정부기관 앞 피켓시위를 조직했다.

 

2009년 프레드 카메니의 모습 : 워싱턴DC 메타친 설립자로 당시 백악관 앞에서 시위주도함

 

그리고 1969 6 28일 미국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위치한 작은 술집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 대한 경찰의 급습에 항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69 628일 토요일 새벽 120분께. 미 뉴욕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 한켠에 자리한 술집 ‘스톤월’(Stonewall) 주변에 일순 긴장이 감돈다. 경찰 순찰차 2대에 나눠탄 정장 차림의 사내 4명이 정복 경관 2명과 함께 스톤월로 들이닥쳤다. 이미 술집 안에는 사복 경관 2명이 잠복근무 중인 터였다. 그 시절 뉴욕에서 툭하면 벌어지던 ‘게이바’ 불시 단속이 시작된 게다.

 

술집 안은 주말을 맞아 몰려나온 200여 명의 젊은이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상황을 장악한 경관들은 이들을 줄 세우고, 신원 확인에 들어갔다. 신분증이 없으면 연행을 피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 옷을 입는 것도 ‘불법’이다. 여성 차림을 한 이들은 따로 여경에게 이끌려 화장실로 가서 ‘성별 확인’을 받아야 한다. 술렁이던 장내 분위기가 이날 따라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분증 제시를 거부하는 이들도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여느 때라면 순순히 신분증을 보여준 뒤 한순간이라도 빨리 현장을 뜨는 게 상례였다. 바야흐로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폭풍 전즐기고 있는 게이들

 

신분증을 제시하고 ‘훈방’된 이들은 평소와 달리 스톤월 주변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단속당한 이들을 경찰서로 실어갈 차량을 기다리는 사이 술집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주말을 알리는 밤인근 술집들도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던 터다삽시간에 100~150명으로 불어난 ‘구경꾼’들은 스톤월 주변을 에워싸고 줄줄이 끌려나오는 이들을 지켜봤다거칠게 끌려나오던 이들이 하나둘 항의를 하기 시작했고군중 속에서 자연스럽게 야유가 터져나왔다갑자기 누군가 외치기 시작했다‘우리 승리하리라.’ ‘게이에게 권력을!

 

스톤월 주변 인파 사이에서 ‘술집 안에 있는 이들이 경찰에게 뭇매를 맞고 있다’는 귀엣말이 빠르게 번졌다“오늘 스톤월이 단속을 당한 건 뇌물을 제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외치자다른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그럼 지금이라도 뇌물을 주자!” 문득 수많은 동전이 단속 경관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맥주캔과 술병이 뒤를 이었다인파도 500~600명으로 불었고구경꾼은 이미 시위대로 변해 있었다경찰의 해산작전은 상황을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몰아갔다경찰특공대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격한 몸싸움이 한동안 이어졌다이날 새벽 4시께 ‘상황’이 종료됐을 때스톤월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현장에서 시위대 13명이 연행됐고경찰 4명을 포함해 시위대 여럿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상 첫 ‘게이 폭력시위’에 대한 흥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이날 이후 6일 동안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 연출됐다‘석벽(스톤월대전’작은 혁명이었다이로써 미 동성애자 인권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이 사건은 동성애 사건으로는 처음으로 주요 매스컴에 보도되었으며, 뉴욕에서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사건으로 조용히 숨어 지내던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각성하였다. 그래서 50~60개 정도였던 동성애자 인권 조직이 1년 후 1,500개로 급격이 늘어났고, 동성애자 인권 확립을 위한 신문도 발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건 1주년을 맞은 1970 6 28, 부당한 정책을 거부하고, 성 소수자 운동을 태동시킨 스톤월 항쟁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워싱턴과 뉴욕에서 미국 역사 최초의 퀴어 행진(Queer parade, 게이 행진이나 자부심 행진으로도 불린다)이 열렸다. 퀴어는 이상하다는 의미의 영어단어로 성 소수자, LGBT (여자동성애자(Lesbian), 남자동성애자(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1970년에 시작된 이 퀴어 행진은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서유럽으로 퍼져갔고, 현재는 세계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Istanbul LGBT pride parade in 2011

Pride Prade

Boston Pride Prade 2015

 

당시 사건을 촘촘히 기록한 스톤월: 게이 혁명을 촉발시킨 사건이란 책을 펴낸 작가 데이비드 카터는 지난 626 AF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부터 미국에선 조직된 동성애자들의 정치운동이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톤월 사건은 극소수의 운동에 머물던 게이 인권운동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바꿔놓은 기폭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