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8일

이준구, 미 워싱턴에 태권도장 개관

산풀내음 2017. 5. 21. 16:55

1962 6 28,

이준구, 미 워싱턴에 태권도장 개관

 

1950년대 미국에 와 태권도를 미국에 소개하고 정착시킨 이가 있다. 바로 이준구 사범이다. 미국에서는 그를 그랜드 마스터 리(Grand Master Rhee)’라고 하며 미국 이름은 준 리(Jhoon Rhee)이다. 미국 국회의사당 안에 최초로 태권도 클럽을 설치하고, 전직 대통령뿐만 아니라 상·하 양원 의원 300여 명에게 태권도를 지도하면서 미국 내에 태권도의 뿌리를 내렸다. 2000년 미국 정부가 발표한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민자 203'의 한 명으로 아인슈타인, 키신저 등과 함께 선정됐으며,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준구는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충남 아산에서 5남매 중 3째로 태어났다. 이후 수원으로 올라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서울 동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준구는 어릴 때 여자아이에게도 맞을 정도로 많이 맞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6살때인 1947년 서울 견지동에 있는 청도관에서 태권도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에는 ‘태권도’라는 말이 없었고 가라테의 한자인 ‘당수’ 혹은 ‘공수도’로 불렸다. 태권도 동작 역시 가라테와 흡사했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육군 소장 최홍희가 만든 후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중, 고등학생에게 금지된 마릴린먼로 주연의 영화를 보고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 배우를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고 그날 저녁부터 미국의 금발 미인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어떤 과목보다도 영어를 열심히 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어를 가장 잘했고 한다.

 

1950년 동국대학교에 진학했지만 6.25로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입대하였고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57년 사우스 웨스트 텍사스 스테이트 갈리지에 입학하게 된다. 꿈에 그리던 미국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1958 4월 대학 내에 ‘코리아 가라테’라는 이름으로 태권도 클럽을 열었다. 당시 미국에는 태권도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다행히 처음부터 170명의 회원이 몰려온 덕에 학비는 해결되었다.

 

그러던 중 1962 5월 워싱턴 국방부에서 태권도 사범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이때 태권도 5단이었고, 태권도 보급을 위해서는 워싱턴 정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터라 흔쾌히 응했다. 그런데 6월에 워싱턴에 도착하니 자신을 초청했던 국방부 직원이 퇴직을 한 것이다. 계획이 무산된 이 총재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곳에 태권도장(준리태권도)을 차렸다. 준리태권도의 탄생은 이렇게 우연치 않게 시작됐다. 이날이 6 28일이다. 2003년 워싱턴주가 매년 '준리의 날'(Jhoon Rhee Day)로 선포한 그날이다.

 

‘워싱턴포스트’지에 광고를 냈더니 120명이 몰려왔다. 그는 태권도를 배우면 체력 단련은 물론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잘하고 가족과도 화목하게 지내게 된다고 홍보했다. 실제로 이준구의 태권도 도장에서는 청소년들이 검은 띠를 따려면 우등생이어야 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며 인성교육이 되어 있어야 하는 등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이러한 교육적인 요소들은 미국 사회의 학부모들에게 인상적으로 비쳤다.

 

그러던 어느 날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그에게 찾아온다. ‘워싱턴포스트지를 읽던 중 국회의원 제임스 클리브랜드가 강도를 당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태권도를 배울 것을 권했고 그는 이준구에게 태권도를 배우게 되었다. 이후 클리블랜드 의원은 미국 의회에 이준구 총재와 태권도를 홍보했고, 많은 의원들이 태권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를 계기로 이준구에게 태권도를 배운 미국 상·하의원이 전 미 하원의장이었던 탐 폴리를 비롯해 리빙스턴 의원 등 350여 명이나 되게 되었다.

 

이준구는 1967년 워싱턴의 TV에 태권도 광고도 시작했다. 1969년부터 1980년까지는 당시 워싱턴에 있는 5개의 TV채널에 하루도 빠짐없이 한군데씩 돌아가며 광고를 했다. 아이들이 “Nobody Bothers Me!(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어!)”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끝나는 광고는 큰 히트를 쳤다. 이후 워싱턴에서 ‘준 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준구가 이소룡과 무하마드 알리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무술영화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이소룡(李小龍, Bruce Lee, 1940 11월 27 ~ 1973 7월 20)은 어릴 적 태극권을 배웠다. 성장 하면서 당랑권과 공력권, 영춘권 등 무술을 섭렵한다. 이후 그는 각종 무술들의 우수한 기술들을 바탕으로 ‘절권도’라는 무술을 창시했다. 그러나 손기술에 비해 발기술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자신의 취약점인 발차기 기술을 보완하기 위하여 태권도를 배운 것이었다. 1960년대 초반 미국 LA에서 열린 세계가라테선수권대회에서 처음 이소룡과 인연을 맺은 후, 이소룡의 부탁을 받고 태권도 발차기 기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후 그는 전보다 위력적인 발차기 기술을 영화에서도 선보였고, 그가 주로 사용한 발차기 기술은 태권도의 ‘옆차기’ 기술이었다.

 

1968년 미국 LA의 모 해변에서 이준구 사범()이 이소룡에게 얼굴 옆차기를 하자, 이소룡()이 왼쪽으로 몸을 피하고 있다. 이준구 사범은 이 기념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준구는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공산주의의 붕괴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구 소련으로 눈길을 돌렸다. 1989년 소련에 둥지를 튼 태권도는 공산주의가 붕괴돼 러시아가 탄생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러시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 65개의 도장이 러시아에서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