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피살

산풀내음 2017. 5. 21. 06:40

1914 6 28,

오스트리아 황태자 피살

 

발칸반도에서는 13세기 무렵 게르만족슬라브족 '문화의 교차점'이었던 발칸반도에는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세르비아등 작은 공국들이 형성됐으나, 역사적으로 주변국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기도 했다. 14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이슬람문명이 들어서자 로마 가톨릭교, 그리스정교, 이슬람교 3개 종교와 알바니아, 그리스, 터키, 불가리아, 세르비아크로아티아계 등 5개 민족, 4개의 언어, 2개의 문자권이 혼재되면서 발칸반도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1769 ~1821)의 몰락 이후 성립된 1815년 이후의 체제(Vienna system, Vienna Settlement)에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상실했던 영토를 되찾았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던 영역과 라구사 등을 새로 장악함으로써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시르미아 등을 얻는다. 오스트리아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보오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발칸반도에 영향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리고 1867 오스트리아 당시 제국의 황제와 헝가리헝가리인 귀족들 사이의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으로 탄생한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경우 1817세르비아가 자치권을 얻고 1821그리스가 독립하는 등 발칸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서서히 상실하고 있었고, 왈라키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도 1861년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어 루마니아 공국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도 범슬라브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마찬가지로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마침내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이긴다. 그 영향으로 루마니아 공국은 루마니아 왕국이 되어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도 완전 독립한다. 불가리아 역시 자치권을 얻어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를 거의 상실하게 된다.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국, 독일 등의 유럽열강들은 1878비스마르크 주재로 베를린 회의를 열어 산스테파노 조약을 개정한다. 이 회의의 결과 발칸 지역에서의 거대 슬라브 국가의 출현이 방지되고, 오스만 제국은 마케도니아트라키아 지방을 돌려 받음으로써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약받는다. 중재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관할권을 얻고, 영국은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얻는다.

 

1815년 빈 체제에서의 발칸 반도()와 현재()

 

1914 6 28, 인류에 대재앙을 예고한 두 발의 총소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 울려퍼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페르디난트(Erzherzog Franz Ferdinand Carl Ludwig Joseph Maria von Österreich-Este, 1863-1914) 황태자비가 이곳에서 열린 육군 대연습 열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중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병원에 실려 갔지만 황태자비는 이미 절명했고 황태자 역시 15분 뒤 사망했다.

 

총격 직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This picture is often said to depict the arrest of Gavrilo Princip, although several scholars say that it depicts the arrest of Ferdinand Behr, a bystander who was initially suspected of involvement in the assassination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가브리오 프린치프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가브리오 프린치프라는 19세 청년으로 세르비아 해방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의 멤버였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7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사건의 책임이 세르비아 정부에 있으므로 세르비아 국내에서 일고 있는 반오스트리아 운동을 금지하라는 요구였다. 세르비아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는 7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린치프는 사건 당시 19살로 사형 집행이 불가능해 20년 형을 선고받고 오스트리아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결핵에 걸려 수감된 지 3 10개월만에 병사했다.

 

이에 앞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참전할 경우 독일도 함께 싸운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 우려한 대로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동족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러시아의 참전은 독일을 불렀고, 이는 러시아와 3국협상으로 묶여 있는 프랑스와 영국의 자동개입으로 이어 졌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태자 피살은 구실에 불과했을 뿐 유럽의 강대국들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명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4년반 동안 6000만명의 젊은이가 전장에 동원돼 900만명이 전사하고 2000만명이 부상할 정도로 두발의 총성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피해는 실로 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결국 이탈리아 전선에서 이탈리아(1915 연합국으로 참전)에 의해 패배하였고, 1918 11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제국의 영토는 세르비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게 할양당하고 남은 영토마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각각 독립함으로써 제국은 완전 해체된다.

 

전쟁에 승리한 세르비아는 1918 12 1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점유하고 있었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그리고 독립국이었던 몬테네그로 지역을 합병하여 통합 왕국을 건설했고, 이후 1929년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는 1941 4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소멸되었다.

 

이 후 '유고슬라비아'제2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1945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수립된공산국가로 이어졌다. 이 나라는 1946에 유고슬라비아 인민공화국으로, 다시 196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나라는 1991에 연방을 구성하던 공화국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분리 독립하면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