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7월 7일,
제1회 퍼그워시 회의 개막
미국, 소련 양국간 수소 폭탄 경쟁이 심화되자 1955년 7월 9일 철학자 러셀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 11명이 캐나다의 작은 어촌 퍼그워시에 모여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핵무기 폐기 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차 대전 이후 반핵 평화운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이른바 `퍼그워시 성명`은 이렇게 발표됐다. 문건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캐나다 6개 나라의 국가 정부 수반에게 보내졌다. 이는 러셀과 아인슈타인이 주축이 되었기에 러셀-아인슈타인 선언(Russell–Einstein Manifesto)이라고도 한다.
1957년 7월 7일 이 성명에 동조하는 10개국 22명의 핵물리학자들이 퍼그워시에 다시 모여 `핵무기 없는 세계, 전쟁 없는 세계`를 주창하는 첫 회의를 열었다.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의 출발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과학과 국제문제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s on Science and World Affairs)`이다.
창립 회의에서는 방사능의 분석을 토대로 핵실험의 중지를 요청했다. 그 뒤 매년 한두 차례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열리고 있는 이 회의는 어디서 열리든 모두 `퍼그워시 회의`라 부른다.
Participants in the 1st Pugwash meeting
창립되던 해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로 촉발된 미소경쟁의 와중에 양측 과학자들의 비공식 대화를 주선한 것을 시발로 핵확산 금지조약(NPT) 제안(1958년), 쿠바위기 중재(1961년),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1963년), 화학무기 협상(1969년) 등 이들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975년의 제25차 회의에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유카와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북한 핵위기 때 북한과 미국간의 대화를 중재하고 제네바 합의와 경수로 제공의 길을 터놓은 것도 퍼그워시 회의였다.
퍼그워시 회의는 1995년 창립 멤버인 롯 블라트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며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회의는 창립 당시부터 고수하고 있는 몇가지 원칙 즉 회원제를 배격하고 오직 초청에 의해서만 회의 참석자들을 선정한다든지, 모든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한다는 고집 등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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