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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의 혁명, 경부고속도로 개통

산풀내음 2017. 6. 4. 11:03

19707 7,

물류의 혁명, 경부고속도로 개통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1964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 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 그는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 수출형 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물건을 만들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릴 정도로 물류가 막힌다면 산업 활성화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단군 이래 최초의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불린다. 6·25전쟁의 폐허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당시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고려하면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판도 무리는 아니었다. 건설을 추진하던 1967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42달러에 불과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비 4297300만 원은 1967년 국가예산의 23.6%나 됐다. 1966년 말 현재 국도 및 지방도 포장률은 5.6%, 자동차 등록대수는 고작 5만 대였다. 고속도로는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계획이었다.

 

1967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정식 기공일자는 1968 2 1일이지만 이미 서울∼오산 간 공사를 3개월 전부터 진행할 정도로 설계와 공사를 병행해가며 서둘렀다. 이 때문에 총 연장 428, 305개 교량과 12개의 터널이 포함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25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970 7 7,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개통됐다. 이는 1968년 개통된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고속도로이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12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였으니 이런 때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인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달릴 수 있는 길을 건설하는 것은 공사의 적합성을 떠나 실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시공에 16개 업체를 비롯해 3개 건설공병단까지 참여해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되었다. 연 인원 892 8000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으며 77명의 숭고한 희생자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토지 헐값 매수로 재산권 침해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에서가장 싼 값으로(1㎞당 약 1억 원)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1969. 8. 14 경부고속도로 공사



개통 당시 경부고속도로

항공촬영한 경부고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