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8일

비비안 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산풀내음 2017. 6. 5. 00:04

19677 8,

비비안 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거의 동격이 돼버린 여배우 비비안 리가 런던에서 5년의 공백 끝에 영화계 복귀를 준비하고 있던 중 폐결핵으로 53세에 사망했다.

 

비비안 리(Vivien Leigh, 1913-1967)1913 11월 5 영국 식민지 인도의 다질링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계 영국인이며,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 연기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등도 배워서 어느 정도는 다룰 줄 알았으며, 무용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자랐고,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으며,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았다. 인도에서 5세에 영국으로 귀국했고, 이후 가톨릭 학교를 다니다가 10대 초반부터 18세 때까지 아버지가 유럽 여행을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를 몇 번씩 전학을 다녔다.

 

 

Vivien Leigh as a young girl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스트엔드의 연극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될 결심을 하게 되고런던 왕립 연극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이 즈음 13살 연상의 귀족인 '허버트 리 홀먼'과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알려진 성인 리(Leigh)도 여기서 얻게 된다보수적이었던 남편은 그녀의 배우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고때문에 그녀는 다니던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

 

첫 번째 아이 출산 이후 자신과 맞지 않는 가정주부 생활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친구들의 독려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고 곧 자신의 에이전트를 만나게 된다이후 연극 무대에 데뷔하게 되는데 첫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찬사를 받는다이 경험은 그녀에게 좋은 기억이 아니라 나쁜 기억으로도 남게 되는데너무 큰 찬사로 인해 엄청난 부담감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연극에서 로렌스 올리비에 (Laurence Kerr Olivier, 1907-1989)를 만나게 된다그들은 서로 첫눈에 반했다. “어떻게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여신이다.”라고 그들 마음 속에서 서로 외치고 있었다하지만 당시 비비안 리는 번듯한 변호사의 아내였고 딸을 두고 있었으며로렌스 올리비에 역시 유부남이었다.


Vivien Lleigh and Laurence Olivier

Laurence Olivier, Vivien Leigh and Leslie Banks in 21 days together directed by Basil Dean

 

이미 눈이 돌아갈 대로 돌아간 남녀는 서로의 배우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비비안 리가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헐리우드에 진출한 로렌스 올리비에를 따라서였다. 처음에는 비비안 리가로렌스 올리비에의 연인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1939)> 이후 세기의 여배우로 등극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더욱 굳어졌다. 끈질기게 버티던 리의 남편과 올리비에의 아내는 이혼에 동의하고 비비안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는 친구 캐서린 햅번과 다른 한 명만이 증인으로 참석한 결혼식을 통해 1940년 부부가 되었다.

 



 

둘은 그렇게 죽고 못살았지만 그 사랑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성정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비비안 리는 그 독한 고집에 비해 그 심리가 강건하지 못했다. 조울증에 시달렸고 툭하면 히스테리를 부려 올리비에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극진히 아내를 보살피던 올리비에였지만 1948년 호주에서 일어난 쌍방 구타 사건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부부는 호주를 방문하여 순회공연을 펼쳤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비비안 리가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무대에 서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분개한 올리비에가 리의 뺨을 때렸고 리 역시 용서하지 않고 남편의 뺨을 맞받아쳤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로렌스 올리비에의 회고에 따르면 사형 선고를 받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오래 동안 결혼 생활은 유지됐지만 최소한 전 같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올리비에는호주에서 나는 비비안을 잃어버렸다고 했으니까.

 

비비안 리는 <애수> <안나 카레니나>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였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1951)>에서 젊은 날의 말론 브란도와 함께 멋진 연기를 펼쳐 또 한 번의 오스카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날카로운 신경과 심각한 병마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블랑쉐는 정신이상자였는데 이 연기에 지나치게 몰입한 비비안 리는 스스로 이 영화가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내뱉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히스테리는 평소에는 잠잠하다가 올리비에와 단 둘이 있을 때에 폭발했다. 로렌스 올리비에도 인내의 한계에 왔고, 마침내 둘은 1960년에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다른 사람과 결혼 생활을 하거나 동거하면서도 둘은 서로를 잊지 못한다. 비비안 리는 지병이었던 폐결핵으로 죽기 전올리비에 없이 장수하느니 올리비에랑 함께 살다가 일찍 죽는 게 나아!”라고 털어놓았고 죽을 때에도 당시의 동거인이 아닌 올리비에의 사진을 움켜쥐고 죽었다고 한다. 비비안 리가 죽을 당시 암으로 투병 중이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그녀의 부고에 제정신이 아닌 채 병석을 박차고 달려갔으며 그녀의 장례를 주관하여 치렀다. 그녀가 죽은 후로도 올리비에는 수십 년을 더 살았고 젊은 날의 바람기를 잠재우고 충실한 남편으로 살다가 죽었다. 80줄에 접어들었던 올리비에를 방문한 한 지인은 옛 비비안 리의 영상을 지켜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한 노인과 마주하게 된다. “그건 사랑이었네. 진짜 사랑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