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8일

백제 무령왕릉 발굴

산풀내음 2017. 6. 5. 00:21

19717 8,

백제 무령왕릉 발굴

 

무령왕, 일본 천황가의 계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비의 인물. 그는 백제 중흥을 이끈 현철한 왕이자 백제의 전성 시대를 연 위대한 군주였다.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고,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는 무령왕. 일본에서 태어나 백제의 왕이 된 이력도 흥미롭고, 그의 동생이 일본의 게이타이 천황이었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도 흥미롭다.

 

무령왕릉은 5-6호 고분 바로 뒤에 있었으나 큰 언덕처럼 생기고 그 위에는 3~4m 크기의 리기다 소나무들이 들어차 있어서 이 고분을 답사했던 전문가들도 단순히 6호 고분 등에 흘러 드는 지하수를 막기 위해 만든 인조언덕으로만 생각했을 정도였다.

 

 

국내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은 그야말로 우연에서 비롯됐다.

‘송산리 벽화’로 유명한 충남 공주 6호분의 결로(結露ㆍ이슬맺힘)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인부의 삽날에 능 입구의 전돌이 걸려든 것이다. 때는 1971 7 9일이었다. 능 입구를 가로막은 흙더미를 파내려 가는 사이 날이 저물고 난데없는 소나기까지 쏟아져 물길을 돌리는 임시 조치만 한 뒤 발굴단은 일단 철수했다.

 

이튿날 즉 7 8일 오전 8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입구가 드러나자 발굴단은 수박과 북어, 막걸리로 조촐한 상을 차려 무덤 주인에 ‘방문’을 고하고 작업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 뒤 전돌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돌 틈으로 봉분을 뚫고 들어온 나무 뿌리들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널길(羨道ㆍ연도) 한 가운데 험상궂은 돌짐승(국보 162) 한 마리가 떡 버티고 서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무덤 주인을 알리는 지석(誌石)이 눈에 띄었다.

 

첫머리에 새겨진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란 글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무령왕이다!” 무덤이 백제의 제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과 그의 왕비 능임을 확인한 발굴단은 흥분에 휩싸였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주인이 밝혀진 것은 그 때가 처음이고 지금까지도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여러 차례 도굴당한 주변의 무덤들과 달리 왕릉 내부가 자연 훼손된 것 외에는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는 점이다. 무령왕릉은 이렇게 1,45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 우리 곁으로 왔다.

 

1971 7 8. 무령왕릉 개봉에 앞서 발굴단원들이 개봉을 사죄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발굴단은 흥분에 들떠 이 엄청난 유적의 발굴을 단 하루 만에 서둘러 끝냄으로써 영원히 씻지 못할 큰 죄를 짓고 말았다. 구경꾼들이 몰려들면서 널 길에 놓인 청동 숟가락이 밟혀 부러지자 다급해진 발굴단은 철야 작업을 강행, 큰 유물만 대충 수습하고 나머지는 바닥에 엉킨 풀 뿌리째 자루에 쓸어 담아 나왔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은 1082,906점에 달하며 이 유물 중 상당 수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유물들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금관과 금동제 신발, 환두대도, 청동거울, 각종 금은 장식, 목받침과 발받침, 금귀고리 등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유물이 없었다. 결국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은 찬란한 백제 문화의 정수인 것이다.

 

특히 이 유물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청동거울이었다. 의자손수대경은 천지사방을 맡아 다스린다는 사신과 상서로운 동물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신비의 거울이었다. 23.2cm의 직경을 가진 이 거울이 일본 천황가의 무덤에서도 발굴된다는 사실은 백제와 왜가 상상 이상의 긴밀한 관계였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1500년 동안 무령왕릉을 지켰던 돌짐승(진묘수鎭墓獸). 무덤 방으로 이르는 길(연도羨道)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