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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동백림 거점 북한 대남공작단사건 발표

산풀내음 2017. 6. 5. 00:15

19677 8,

중앙정보부, 동백림 거점 북한 대남공작단사건 발표

 

헤겔의 노동 개념을 주제로 1961년 박사학위를 받은 임석진 명지대 교수는 당시 서독 TV에도 나오면서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고, 김일성대 총장이나 북한 노동당 정치국원들이 동베를린에 오면 만나자고 연락이 오곤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임 교수는 이들과 어울리며 1961 9월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에 가 3주동안 머물렀고 1966 6월 재차 평양을 방문해 당시 이효순 노동당부위원장(대남사업총국장)을 만났다.

 

귀국 후 튀빙겐대에 유학하며 모 신문 특파원으로 일하던 친구 이기양이 1967 5 14일 체코 프라하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북한에 납치됐다고 직감, 가깝게 지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척을 찾아가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5 17일 박정희 대통령과 2시간 남짓 면담했다.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에 내용 확인을 지시했고, 중앙정보부는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임석진의 진술을 바탕으로 40여명의 간첨혐의자를 파악한 뒤, 6 10일부터 황청 중앙정보부 제1국 부국장을 총책임으로 39명을 현지로 급파했다. 황청은 주독 한국대사관을 장악한 뒤 6 16 3-4명씩 1개조로 간첩혐의자 체포를 위해 작업을 시작했고 18일 독일과 프랑스에서 40여명을 일제히 검거했고, 이 중 30명을 한국으로 강제 귀국시켰다.

 

김형욱은 20일 뒤 7 8일에 동백림 사건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임석진 명지대 조교수가 1958 9월 북한 공장원에 포섭돼 동베를린의 주독 북한대사 박일영을 접촉한 이래 동베를린을 오간 사람은 1967 5월까지 서울대 문리대 황성모 부교수를 포함 모두 15명에 이르고,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찾은 이들은 북한대사 박일영과 이원천 등과 접촉하면서 사상교육과 난수표 조립, 암호해독 등의 간첩교육을 받았다. 특히 임석진을 비롯한 7명은 1961 8월부터 1965 8월 사이 소련과 중국 등을 거쳐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천상병 시인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그 외에도 정하룡 경북대 조교수, 조영수 정치학 박사, 김중환 한일병원 피부과장, 천병희 성신여대 강사 등이 있었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을 발표하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1967 12 13일 열린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 외국환관리법 등이 적용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정하룡, 정규명 2명에게는 사형이, 조영수, 강빈구, 윤이상, 어준 4명에게는 무기징역 등이 선고됐다. 1968 1 15일 서울고법 재 항소심에 이어 1969 3 31일 열린 대법원의 재 상고심에서는 최종 형이 확정되었다.

 

동백림 사건 공판정에 서 있는 피고인들

 

그러나 사건 연루자 들은 3년 만에 모두 풀려났다. 작곡가 윤이상은 1969 2 24일에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고, 이응로 화백도 같은 해 3 7일에 풀려 났다. 임석훈, 최정길 등도 그 해 1월과 3월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고, 사형이 확정된 정규명, 조영수까지도 1970년 광복절에 석방되었다.

 

동백림사건에 관련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던 윤이상 씨가 검찰의 형집행정지처분을 받고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옥고를 치른 후 출소하여 손녀 이경인과 기쁨을 나누고 있는 이응로 화백

 

그러나 재독 음악가인 고 윤이상 선생을 비롯 무려 194명이 연루됐던 1967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간첩단'으로 포장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피의자들의 단순한 대북 접촉 및 동조행위까지도 국가보안법및 형법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다. 또 수사과정에서 신체적 가혹행위가 행사된 것은 물론, 서울대 학생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공작단의 하부조직으로 왜곡하기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2006 126일 오후 국정원에서 `동백림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면서 이 같이 밝히고 정부는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진실위는 특수교육의 경우 강요된 측면이 강하고 귀국자들에 대한 북한의 지하조직 구축 등 지령사항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이행하지 않았고 3∼4명만이 호기심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안착신호를 발송하고 북한 방송을 1∼2회 청취하는 등 활동의 위반 정도가 약한 편이었다고 판단했다.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중정은 당시 관련자 203명 가운데 66명을 검찰에 송치하면서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했고 검찰도 23명을 간첩죄와 간첩미수죄로 기소했지만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적용 받은 피고인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진실위는 그럼에도 불구, 중정이 당시 대표적인 학생서클이었던 서울대 민비연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이례적으로 수사도중 10일 동안 7차례에 걸쳐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한 것은 이 사건을 1967 6.8 부정총선 규탄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진실위는 특히 중정은 혐의가 미미하고 범의가 없었던 사람에 대해 범죄혐의를 확대하고 귀국 후 대북접촉 활동을 과장하고 특정사실을 왜곡하는 등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발표했다며 그 대표적인 예가 고 천상병 시인이라고 말했다. 천상병 시인이 한 대학 친구로부터 동백림을 다녀온 사실을 들은 것을 암약 중인 간첩임을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해 송치했으며, 이 과정에서 전기고문 등을 통해 허위자백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진실위는 당시 남북간 대립상황을 고려할 때 중정이 이를 국가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 사건조사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독일, 프랑스, 미국, 오스트리아 등 외국으로부터 30명의 용의자들을 연행해 온 것은 해당국의 주권과 국제법을 무시한 불법행위로 이 사건이 처음부터 잘못된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진실위는 이번 조사를 위해 34169장에 달하는 국정원 보유자료와 43529장의 다른 기관 보유자료, `김형욱 회고록' 등 공개자료 30여종과 당시 신문기사를 검토한 것은 물론 사건 당시 중정 및 군 방첩대 직원, 관련자 및 유족 등 46회에 걸쳐 47명과 면담했다.

 

윤이상 부부와 김일성. 윤이상(1917-1995)은 어릴 적 친구였던 최목남(월북)의 아들 최정길을 데리고 베를린에서 최목남을 만났다는 것과 1963년 평양을 방문했다는 것 등이 문제가 돼 1967년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돼 2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활동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결국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9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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