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8일

북한 주석 김일성 사망

산풀내음 2017. 6. 5. 00:27

19947 8,

북한 주석 김일성 사망

 

북한 주석 김일성(金日成, 1912-1994) 1994 7 8일 사망했다. 북한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9일 낮 12시 특별방송을 통해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 7 8일 오전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고 발표했다. 북한방송들은 김일성의 사망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를 발표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쌓이는 과로로 7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금수산의사당 (주석궁)에 안치하며 장례식은 17일 평양시에서 거행한다고 발표했다. 8일부터 17일까지는 애도기간으로 정했다.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45년 소련군과 함께 진주해 49년 동안 북한을 통치해 온 김일성은 사회주의 건설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건설한 나라는 현대 문명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인 우상국가였다. 그가 민족에 저지른 최고의 죄악은 6·25였다.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가슴에 총격을 가한 6·25는 민족분단을 불치의 것으로 만들었다. 김일성은 폭력에 의해 내부권력을 유지하는 한편 남한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테러를 자행해 아웅산 폭파사건이나 KAL기 폭파사건 등을 저질렀다.

 

김일성의 사망소식으로 한반도는 갑작스럽게 충격과 불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도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불과 17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1994 1차 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영변 핵시설 폭격론이 대두됐다. 북한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이후 한반도 핵 위기는 분단 이후 최초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호재를 타고 통일 열기로 반전됐다. 그러나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또 다시 요동쳤다.

 

김일성 사후 외부에서는 그의 사망원인을 두고 갖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소문은 북한당국이 외국의 조의대표단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증폭됐다. 총살 등으로 시신을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이런 짐작은 김일성의 시신이 공개되면서 수그러들었다.

 

김일성 사망 5개월 전인 그 해 2,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북 때 김일성이 “앞으로 내가 직접 국정을 이끌어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터가 김정일과 면담을 여러 차례 신청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거절했다. 부자간의 권력 다툼을 암시하는 정황들이 공개되면서 ‘권력암투설로 인한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탈북 시인 최진이씨는 북한 지식인들과 중앙당 간부들 사이에서 김일성 사망을 둘러싸고 온갖 의문투성이 소문들이 나돌았다고 말했다. 월간 『신동아』가 입수, 게재(2005 1월호)한 북 내부 반체제 문서에는 “1994년 김일성이 죽을 당시 중앙과 지방의 적지 않은 간부들과 각 분야 지식인들이 직감한 것과 같이 김일성의 죽음은 김정일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써있다.

 

최씨는 맨 처음 나돈 소문은 담당 의사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일성 사후 처음 들려온 말은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기절하자 젊은 담당의사가 함께 졸도해 버렸다는 것이다. 원래 김일성의 유능한 내과 담당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한 주일 전부터 아파서 김일성의 묘향산 행에 따라서지 못했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담당의 문제에 대해 내부 문서는 “1994 7 8일 김일성 급사 당시 그의 곁에 새로 임명된 젊은 이비과 담당 주치의사만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봉화진료소 의사들조차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들 했다.

 

1990년대 후반 국내로 들어온 한 의사 출신 탈북자는 “김일성의 상태가 위급해지자 묘향산에 올라갔던 의사들을 긴급히 호출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 바로 곁에 의사들이 없다는 말이 된다. 김일성 주치의들이 묘향산을 몇 번을 갔는데 하필이면 새벽 2시를 전후해 묘향산에 간 것이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심장질환을 앓아왔던 김일성 곁에 심장담당 주치의가 없었다는 점, 신속하게 응급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점, 구급차와 직송기를 회항시킨 점 등을 들어 고의적인 방치가 아니었냐는 것이다.

 

또 하나의 소문은 김일성은 김정일의 그늘 속에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장미 빛 환상 속에서 인생의 황혼을 꿈꾸고 있었다고 한다. 2차 정상회담까지 내다보고 기차로 서울 가고픈 마음에 DMZ 철길을 잇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황해제철소 지배인을 불러 7 15일까지 레일 생산을 끝낼 것을 지시하자 지배인이 식량공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후 김일성은 김경희를 시켜 현장 조사를 시켰고,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김일성은 ‘내가 부를 때까지 누구든 찾아도 나를 깨우지 말어’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방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심장이 멎어있었다.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자신의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김일성을 강제로 숨지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신동아』게재 내부 문서는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그 동안 해왔던 거짓말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김일성을 심장쇼크를 통해 암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남한에 가면 수많은 인민들의 환영을 받을 것이고, 북한 주민들은 잘 먹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 사실이 들통이 날까 봐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충신, 효자’ 행사를 하면서 김일성을 '귀머거리에 소경'으로 만들고, 인민생활을 도탄에 빠트리고, ‘조국통일의 구성’이 되려고 한 김일성의 ‘평생념원’을 우롱한 대역죄를 회피하기 위해 심장발작을 일으키게 해 죽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열거한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소문 외에도 부검을 서두르고 사인을 급히 결론 내린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은 근거가 미약하다. 주치의가 곁에 없었다거나, 악천후로 구급차가 접근하지 못했다거나, 식량난으로 쇼크를 받아 쓰러졌다는 설들은 어느 하나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북한 내부에서 떠도는 괴소문은 말 그대로 ‘떠도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김일성은 겉으로는 괜찮았지만 만나 얘기를 해보면 오래 견디지 못할 사람이었다. 듣는 것도 어려워했으며, 그해 5월 눈수술을 받고 휴식이 필요했지만 카터를 만나 피로가 누적됐다"고 말했다.


황 전비서는 “김정일이 남한 주민들이 떠받들 것처럼 말해 조국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무척 들떠 있었으며 정상회담 준비를 손수 앞장섰다. 이 때문에 과로가 심장에 부담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김일성은 스위스 의료진을 불러 진찰을 받을 계획을 세울 정도로 심장이 오래 전부터 안 좋았다고 한다. 82세의 고령에 과로까지 겹쳐 심근 경색과 쇼크가 겹쳐 사망했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에 상당한 근거가 되는 점이다.

 

Kim Il-Sung ruled North Korea from its creation in 1948 until his death in 1994. Installed with the support of the Soviet Union, he led his country into the Korean War in an effort to unite the Korean peninsula under communist rule.

Here, in April 1948, Kim Il Sung speaks at the joint North-South meeting. That was of the last major events when Taegukgi, the Korean Flag of Great Extremes and the flag currently used in South Korea, was still hoisted in Pyongyang.

A few seconds prior to when this picture was taken, on July 10, 1948, the DPRK Constitution formally came in force in northern Korea. The new flag of the DPRK is hoisted for the first time by Kim Tu Bong. Although now the creation of the DPRK is formally calculated from the formation of the first Cabinet of Ministers on September 9, 1948, it was on July 10 when the process of the division of Korea became irreversible and North Korea was truly born.

After the Armistice agreement was singed in Panmunjom, Kim Il Sung, wearing his marshals uniform, signs it in Pyongyang. Kim Tu Bong (chairman of the Presidium of the Supreme Peoples Assembly, purged in 1958) is sitting next to him. The General giving Kim the document is Nam Il (aka Yakov Petrovich Nam), who signed it in Panmunjom. Finally, the woman behind Nam Il is Pak Chong Ae (aka Vera Tsoi), Chairman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Union of Democratic Women. In a few decades she would be purged as well.

This pictures is dated 1955. Ten years had passed after the DPRK came to existence. In two years, Vice Marshal Choe Yong Gon (the rightmost), the DPRKs second-in-command, would be stripped of rank during some very murky circumstances. Soviet dominance is still clear, but only in a year will the two countries clash for the first time and the DPRK will start to move away from Moscow until, in 1967, Kim Il Sung will establish a new ideology, based on worshipping him, with little place for Lenin, Stalin and the Soviet Union.



1994년 카터 평양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