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4일

이준 열사 분사(憤死)

산풀내음 2017. 6. 8. 21:07

1907 7 14,

이준 열사 분사(憤死)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 일제의 조선 침탈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서울을 출발한 것은 1907 4 22일이었다. 이상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위종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해 6 25일 목적지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며 대회 참가를 요청했다.

 

만국평화회의보(1907 7 5일자)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패한 의장국 러시아는 면담조차 꺼렸고, 영·일동맹의 두 당사자인 일본과 영국은 훼방을 놓았다. 사무국이 조선 정부에 신임장을 조회하는 전보를 보냈지만 조선의 통신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통감부가 이에 응할 리 없었다. 세 특사는 할 수 없이 각국 대표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신문을 통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열강 대표들이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준 열사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분사(憤死)한다. 7 14일이었다.

 

헤이그 특사 특집 기사가 실린 해외 현지 보도

 

이준 열사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난무했었다. 먼저 이준의 사망을 보도한 것은 일본의 진서신문이다. 진서신문(鎭西新聞) '이준은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이틀 전에 사망하고 어제 장의를 집행…'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7 18일에 '어제 동경전보를 접한 즉 이준씨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라고 보도했으며, 황성신문은 7 19일에 '이준씨는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割剖)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중(同友會中)으로 도래하였다는 설이 유()하더라'라고 보도했다.

 

1956년 이준의 사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자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개월 간에 결쳐 각종 문헌자료의 기록과 각계인사의 증언을 검토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할복자살은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허구"였다.

 

조사결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양기탁이 단재 신채호, 배델과 협의해 이준의 분사를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the 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와 가진 인터뷰에도 할복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준 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기는 하였으나 매우 건강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준의 할복자살 소식은 이미 조선 전토로 번진 뒤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독립군가인 '용진가'의 가사에는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군 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 공과 안중근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라는 부분이 포함돼 있다. 또 민족주의 진영의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장 많이 이용한 '동국사략(東國史略)'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 '충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렸다'고 서술했다.

 

헤이그 밀사를 빌미로 5일 뒤에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분이 안 풀렸는지 궐석재판으로 세상을 떠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헤이그에 묻혔던 시신은 1963년에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