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4일

이라크 7.14혁명

산풀내음 2017. 6. 8. 21:21

19587 14,

이라크 7.14혁명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이 이루어낸 메소포타미아 하천문명은 BC 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최고의 문명이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의 고대국가가 이 지역에서 흥기하여 멸망하였으며, 외부의 침입과 정복도 많이 받았다. 7세기 중엽에는 아라비아반도에 출현한 이슬람교도가 침입하여 그 세력 하에 들어갔지만 8세기에 시작된 아바스왕조 시대에는 쿠파, 바그다드 등이 수도(首都)가 되어 이슬람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1세기 중기 이후에는 셀주크트루크, 몽골, 티무르의 지배를 받았으며, 1534년부터 제1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간은 터키에서 발흥한 오스만투르크 제국(帝國)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1899년 오스만인들이 독일인들에게 내준 철도부설권에 자극 받은 영국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이라크를 점령했다. 1921년 영국의 보호를 받는 군주국이 세워졌고, 1931년 거대한 저항의 결과로 1932 10 3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고 파이살 1(King Faisal 1, 1885-1933)가 국왕에 즉위하면서 왕정이 시작된다. 파이살 1(재위, 1921-1933)의 요르단의 하심왕가와 같은 뿌리의 왕가였다.

 

King Faisal I(Middle) of Iraq - London - 1927

 

그러나 실질적으로 1950년대까지 이라크는 독립 국가의 모습을 한 영국 제국주의의 속국이었다. 형식적으로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이 실세라고 믿지 않았다. 영국군은 두 곳의 공군기지에 주둔했고, 영국 관료들은 이라크 정부의 모든 부서에 “전문가”로 참여했다. 영국의 후원 아래 이라크 내 23개 가문이 56퍼센트의 민간 상업과 산업 자본을 소유했고 토후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영국 제국주의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부역자들”이었다. 옛 오토만제국 지방관료 출신인 누리 알 사이드는 이들 부역자들을 대표하는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중의 저항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영국 대사관으로 도망갈 준비가 돼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이 불황을 겪자 이라크 경제도 침체에 들어갔다.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삶의 질이 떨어졌다.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갈수록 높아졌다. 그리고 영국 통치 시절부터 각료를 지내고 총리를 무려 7차례나 했던 누리 알 사이드는 이라크석유회사(IPC)의 수입 70%를 외국 투자자가 아닌 이라크 정부로 귀속시키고 인프라 투자를 늘리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나 이라크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외국인 자문단’은 이를 거부했다.

 

1950년대 석유호황을 타고 이라크 경제가 성장했지만 평범한 이라크 사람들은 혜택을 받지 못했다. 당시 바스라에 파견된 한 영국인 관료는 자신이 목격한 끔찍한 가난 앞에서 몸서리쳤다. 그는 왜 당장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지 의아해했고, 나중에 일어난 사건은 그가 옳았음을 입증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과 농민, 노동자간의 양극화로 이라크 공산당이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특히 1952 7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일으킨 쿠데타로 왕정이 몰락하고 나세르가 정권을 장악한 후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56 7월에는 수에즈 운화를 국유화 하는 등의 일련의 변화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1958 2월 1 이집트시리아가 연합해 아랍 연합 공화국을 탄생시키자, 2월 14 이라크도 요르단과의 연맹 조약을 맺었다. 참고로 아랍연합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은 실질적으로 3년 조금 넘게 유지된 국가이지만 아랍권의 통일을 실행에 옮긴 최초의 성과이다. 1961 시리아에서 바트당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시리아가 탈퇴했다. 하지만 나세르 대통령은 그 후로도 시리아의 연합 복귀, 또는 다른 아랍 국가의 추가 가입 가능성을 있다고 보아 1971까지 국호를 계속 아랍 연합 공화국으로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8 여름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레바논 위기로 인해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파병되는 이라크군을 이끌던 육군 장교 아브드 압둘카림 카심(Abd al-Karim Qasim, 1914-1963)7월 14 바그다드로 방향을 돌려 7.14 혁명를 일으켰다. 혁명군은 아무 저항 없이 파이살 왕과 왕실 근위대를 항복시켰다.

 

오전 8시 압둘 사타르 사바 알이보우시 소장이 파이살 2세와 황태자이자 그의 삼촌인 아브드 알일리, 일리의 아내 하이얌 공주, 일리의 어머니 나프사 공주, 파이살의 이모 아바디야 공주와 그의 하인들을 비롯해 측근들을 끌고 와 무차별 폭행하고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 다음날 7월 15에는 누리 알세이드 총리도 암살당하고 카심의 혁명군들에 의해 왕정이 폐지됐으며 이라크 공화국이 선포된다.

 

이라크의 마지막 왕 파이살2(1935-1958)() Sheikh Ahmed al-Yawar Sheikh Shamma(오른쪽 사진 중 중앙), Abdul Ilah(오른쪽 사진 중 왼쪽)와 함께

Heavily armed revolutionary soldiers are seen in a street of Baghdad, Iraq, July 14

The mutilated corpses of Crown Prince 'Abd al-Ilah of Hejaz (left) and Prime Minister Nuri al-Said (right).

 

쿠데타는 아랍민족주의에 공조, 요르단과 레바논에 군병력을 지원하는 왕정에 반대 한데서 시작됐다. 군부는 요르단과 레바논의 내부반란 진압을 지원했던 파이잘 왕에 반대해 왔었다. 군부는 즉각 이집트 나세르 장군의 반서방, 범아랍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럽에 병력 수송기를 파견했고 영국의 맥밀란 수상은 군 일부에 경계령을 내렸다. 레바논 대통령 키밀 샤마운은 즉각 서방 강대국에 자국과 이라크와의 국경폐쇄를 요청했고 요르단의 후세인 왕도 도움을 요청했다. 이라크의 군사 쿠데타는 중동에 새로운 긴장상태를 낳았고, 미국과 소련을 새로운 대결양상으로 몰고 갔다.

 

미국은 카심 정권을 용납하지 않았다. 1963년까지 총리직에 있던 카심은 정권 내부 권력투쟁으로 기반이 약해졌다. 1963년 바트당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카심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사담 후세인은 1969년 바트당의 2인자가 됐고 1979년에는 대통령이 돼 철권 독재자로 군림했다.

 

압둘카림 카심

Iraq 1959. Kurdish personalities visiting the new leaders in Bagdad: from left to right, general Abdul Karim Qasim, Daoud Beg jaf, 3rd Wasfi Taher, 4th Sheikh Kader Tchevessa.Ir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