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7일

6ㆍ25전쟁 휴전협정 조인

산풀내음 2017. 6. 18. 10:56

19537 27,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6·25가 발발한 지 만 31개월, 휴전협상개시 2년여 만인 1953 7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UN(대표단 수석대표 미국 육군 중장 윌리엄 K. 해리슨(William Kelly Harrison Jr.), UN군 총사령관 미국 육군 대장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ayne Clark))과 북한, 중공군측(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단 사령관 팽덕회(彭德懷)) 18통의 휴전협정문서에 서명했다.

 

판문점에서 유엔군 대표 해리슨 소장과 북한의 남일이 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오후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를 비롯하여 북한의 김일성 그리고 중국지원군 사령관 팽덕회가 휴전협정서에 최종적으로 서명하였다.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참전 16개국을 대표해 서명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과 조선노동당 서기 박정애가 둘러선 가운데 김일성이가 휴전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본문 5개조 및 63개항으로 구성된 휴전협정은 비무장지대 (DMZ)의 설정,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시위원회 설치, 포로교환, 고위급 정치회담 등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휴전 합의는 8 28일 제7차 유엔총회에서 "국제평화 및 안전의 전면적인 회복을 위한.... 주요한 단계"로서 승인되었다. 이로써 3년간에 걸친 유엔의 군사개입은 끝막음을 하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최덕신 육군 소장을 배석만 시킨 채 협정문에 사인하지 않았다.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영문으로는 “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이다.

 

맥아더는 1950 10 2일 전 부대에 북진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북한을 점령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트루먼은 맥아더 사령관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물었고, 이에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의 공산은 극히 적다. 그들은 공군이 없기 때문에 만일 평양을 확보하기 위해 남하할 경우에는 사상 최대의 섬멸전에 의해 희생되고 말 것이다. 전쟁은 11 23일의 추수감사절까지는 끝을 내고,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제8군을 일본으로 복귀시키고 싶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는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10 18일 압록강을 넘어 25일에 총공세를 취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처참히 무너졌다. 결국, 맥아더 사령관은 북한에서의 철수 명령을 내렸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평양을 떠나 38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북한 지역 내에서의 총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이 고착상태에 빠지자 유엔 내에서 협상을 통한 해결 노력이 시도되게 된다. 가령, 유엔총회는 12 14 13개 아프리카 및 아시아 국가들이 발의한 결의문을 채택하고, "3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휴전 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은 미국과 중국의 입장차이로 큰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중국과의 정전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은 1951 6월 유엔주재 소련대사와 만나 정전을 논의했고, 형식적으로는 소련이 먼저 정전협상을 제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1951 6 16일 유엔이 휴전보장 성명을 발표하자 뒤이어 6 23일과 27일에 각각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와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 제안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6 30일에 리지웨이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한다. 이후 1951 7 1일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회(펑더화이)가 공동명의로 휴전협상을 동의하면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정전협상'을 반대했다. 1951년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 제안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를 거부했고, 계속해서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이승만의 이런 모습을 통해 그가 진정한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그의 북진통일이나 정전협상반대는 현실을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에 가깝다. 이승만은 자신을 통일된 나라의 지도자로 남아 있기 원했지만, 사실 미국과 유엔군의 입장에서는 그의 정치적 입장까지 고려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정전협상이 개시되기 전까지 전쟁 일 년 만에 무려 78.800명의 인명손실과 100억 달러가 넘는 전쟁비용을 감당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으로 재선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처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이 미국은 꼴 보기 싫었고, 그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까지도 수립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야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다. 이승만은 총선의 패배로 재선이 불가능해지자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부결되었다. 그러자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5 25일 국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26일에는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벌인다. 이 사건으로 부통령 김성수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고 반발하여 부통령직 사표를 냈다.

이승만에게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것에만 모든 것을 집중했다.

 

휴전 협상은 약 2년간에 걸쳐 지루하게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전쟁은 소모전으로 계속되었다. 중공과 북한이 유엔 비회원국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전의 해결, 특히 휴전협상과 관련하여 복잡한 요인이 되었다.

 

무기휴회 상태였던 휴전협상이 타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1953 3 1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공산 측이 부상병 포로 우선교환에 합의해왔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휴전협정 후에도 한국을 계속 방위하겠다고 언명하면서 협상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4 12일 성명을 통해 휴전반대 단독북진을 주장했고 국회도 4 21일 북진통일을 결의했다. 6 8일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되자 9일부터 전국적으로 격렬한 데모가 잇따랐고 이 대통령은 6 18일 반공포로 27천명을 석방했다.

 

휴전반대 시위

 

6 22일 이 대통령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회담을 갖고 한국정부의 휴전협정 동의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중국군 즉시 철수, 제네바정치회담의 시한설정 등 3개항을 제시했다.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로버트 특사를 한국으로 보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연내에 체결하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7 24일 휴전협정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휴전 협정 서명을 나흘 남겨놓고 한창 공사중인 조인식장 건물. 그동안 협상장으로 사용해 왔던 새 건물 터 뒤쪽의 목조 건물은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될 조인식장으로 쓰기에는 장소가 비좁아 새 목조 건물을 따로 짓게 되었다. 1953 7 23.


정전협상 한국군 대표 최덕신 장군이 크라크 대장 서명식장에서 퇴장하고 있다. 이 자는 이후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여 5.16 직후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63 8 9, 서독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이어, 통일원 고문, 베트남 공사, 한중일보 사장(1972) 등을 지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원흉으로 지탄받았고 서독 대사 역임 시에는 동백림 사건의 책임자였다. 특히 동백림 사건을 주도한 후에 서독 정부와의 교섭에 실패해서 국제적인 외교문제로 비화하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사태수습을 위해서 최덕신을 내쫓아버렸다. 이후 친북노선으로 전향했고 1986년에는 급기야 북한으로 망명한 천하에 잡놈이다.

총성이 멎은 다음 비무장지대에서 전우들의 시체를 챙기러 나온 중공군들. 미군병사가 중공군시체 10구가 있다고 열손가락을 펼쳐 보여주었는데도 중공군들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고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중 용기 있는 한 명이 슬금슬금 내려오기 시작하니 다들 따라왔다.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천으로 입을 막고 있다.

비무장지대 임을 알리는 글자가 새겨진 팻말과 철조망을 치는 미군들

휴전과는 무관하게 남쪽 지리산에서는 공비들의 활동이 여전했다. 이들 공비들을 사살하면 보상금이 지급되기도 했다. 죽은 공비를 산 아래로 운반하고 있는 경찰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