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4일

국토건설단의 부활?, 삼청교육대 설치

산풀내음 2017. 6. 29. 19:59

1980 8 4,

국토건설단의 부활?, 삼청교육대 설치

 

1980 5월의 광주는 전두환 정권의 위기이자 기회였다. 하지만 총검(銃劒)은 그들만의 힘이자 승리의 밑바탕임이 금방 입증되었다. 5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가 설치되었고, 정부의 모든 권력은 실질적으로 장악되었다. 그 목표는 불안한 권력의 안정적 확보였다. 국보위가 내세운 네 가지 과제 중, 네 번째가 ‘사회악(社會惡) 일소(一掃)에 의한 국가 규율의 확립’이었고, 그들은 사회악을 ‘국가의 안전 보장과 사회 안정을 저해하고, 국민의 혐오와 원성의 대상인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조직·상습 폭력, 치기배, 기타 퇴폐적인 행위자, 그리고 재범의 우려가 있는 자’로 규정하였다.

 

 

이는 박정희 정권 탄생 과정을 철저하게 모방한 것이다. 1961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정치 깡패를 제거한다는 명분과 함께 15,800명의 폭력배를 검거하였고, 이들 폭력배를 국토건설단(國土建設團)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국토 건설 사업에 강제 동원하였다. 공공질서와 사회를 파괴하는 불량배를 제거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의 환심을 사고, 이들을 근로 생산 현장에 투입함으로써 대중적 관심을 돌렸던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대중조작 수법이었다. 그 효과는 컸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폭력배를 소탕하여 사회악을 일소하겠다는 명분으로 1980 8월 4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라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를 설치하였다. 삼청순화교육은 11공수단과 13공수단 등 특전사를 중심으로, 전국 25개 사단에서 실시되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숙소와 훈련장은 이미 두세 달 전부터 준비되었으며, 교육을 담당할 조교들은 미리 차출되어 강도 높은 유격훈련을 받기도 했다.

 

당초에는 2만 명 수준을 목표로 하였으나 경찰서 간에 과잉 충성경쟁이 붙어 영장 없이 검거된 시민 들은 6만 명이 넘었고, 이중 재판회부자(A)와 훈방자(D)을 제외한 40,347명을 군에 인계하여 위탁교육을 실시했다. 대상자에는 학생과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으면 전체 피검자 중 1/3 이상이 본연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무고한 시민이었다. 검거된 사람들은 네 등급으로 분류되었고 주 Target B C등급이었다.

 

A급은 폭력조직의 수괴, 마약밀수, 전과가 많은 자 등으로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군사재판의 대상이었다. B급은 기타 정치/경제 폭력배, 강도/절도 등 재범의 위험이 있는 전과자로 4주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은 폭력 사실이 경미하고 우발적인 경우 등으로 4주 순화교육이었으며 D급은 훈방 대상자로 사안이 경미한 경우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시검문 시 신분증을 미 지참했다는 이유만으로 B급으로 분류되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전두환을 조금이라도 비방한 자는 가차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끌려간 사람들 중엔 나이 어린 중, 고등학생(14~17)도 있었고, 주로 부모가 항의할 여력이 되지 않는 저소득층 자녀나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잡혀갔다. 어떻게든 할당량을 채우라는 명령으로 인해 연고가 없으면 잡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말이 교육이지 구타와 가혹 행위로 시작된 교육은 야만적 폭력의 연속이었다. 젊은 군인들은 대상자 전부를 범법자와 동일시했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조직 폭력배, 깡패를 다룬다는 지침이 내려졌고 기선 제압을 위한 선제 폭력이 허용되었다. 조교들에게는 제압하지 못하면 오히려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주입했다. 젊은 군인들은 처음부터 필요 이상의 폭력을 사용했고, 그 결과 엄청난 희생자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조교들이 맞이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한참 나이 많은 형님이나, 심지어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처음에는 말조차 쉽게 놓지 못했다는 한 조교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참에게 두들겨 맞아 척추 뼈를 심하게 다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교들은 삼청교육대 수련생들을 개나 돼지같이 다루었다. 잔혹한 신체 폭력과 가혹 행위는 모든 삼청교육대 공통의 일상이었다. 1사단에서 교육을 맡았던 이 조교는 자신의 수련생들을 넓고 깊은 군대 화장실 분뇨 속에 집어넣어 그 분뇨가 다 닦일 때까지 집어넣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가학적이고도 잔인한 폭력의 실상은 삼청교육대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 결과 훈련 기간 중 자살을 포함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1988년 국방부는 현장에서 사고 등으로 사망한 사람만 54,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97, 정신장애 등 상해자 2678명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이 숫자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시각이 대부분인데, 어느 교관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의 부대에서만 3명이 자살을 하였고 또 다른 교관은 자신이 속한 연대에서만 1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따라서 실제 사망자 수는 현장 및 후유증 합쳐 1천 명이 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삼청교육대 반성문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