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4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투신자살

산풀내음 2017. 6. 29. 20:08

2003 8 4,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투신자살

 

84일 새벽 540분경, 현대 계동 사옥. 사옥 주변을 청소하던 직원이 화단 안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처음 그 직원은 술 취해 쓰러진 취객인 줄 알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새벽 운동을 위해 일찍 출근한 임직원 중 일부도 차를 타고 지나가다 화단 안에 쓰러진 사람을 봤지만 역시 취객이라 생각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누군가 죽은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가 접수된 순간에도 사자(死者)는 신원불명의 인물이었다.

 

대북송금 및 비자금 150억 원 조성 의혹과 관련해 검찰의 조사를 받아오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2003 8 4일 새벽 서울 계동 현대사옥 1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한 것이었다.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정 회장은 현대아산 사장과 부인, 자녀 앞으로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랍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A4용지 4장짜리 유서를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등진 것이다.

 

비운의 황태자, 정몽헌

故 정몽헌 현대아산회장 장례식이 2003 88일 오전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러졌다.

 

국내외 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당시 뉴스 시청률이 평소보다 10% 정도 높았다는 사실은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의구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가장 큰 의구심은 왜 자살했을까?’였다.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이 검찰의 과잉수사였다. 현대아산 사장은 “오죽하면, 오죽하면 저 모습이 되셨겠냐고! 검찰의 짓궂은 취조에 너무도 견디기 어려우셨던 거야! 해도 해도 너무했던 거야” 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연이어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검찰이 조사 도중 전화번호부 같은 책으로 정회장의 머리를 때렸다”며 가혹행위 의혹을 제기했다. 물론 검찰은 이런 가혹수사 의혹에 대해 강력히 부인했다. 하지만 가혹수사는 아니더라도 압박수사가 자살의 동기가 된 것은 여러 정황상 분명해 보인다. 정회장은 자살하기 하루 전인 82일에도 12시간이나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故정주영 회장의 5남으로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남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고 친구들하고 놀 때도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나는 사람 사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선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런 정회장을 “성격이 찬찬한 아이”라고 표현했다.

 

1953년 부산 광복동 시절의 정주영 가족

 

1975 11월 현대중공업 차장으로 현대그룹에 입사했다. 1979년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미국 뉴저지의 페얼리디킨슨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가 영어로 유머까지 구사하며 외국 경영자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다. 정 회장은 1981년 현대상선 사장을 시작으로 최고경영자의 길을 걸었고, 1982년에는 현대전자를 만들었으며, 같은 해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는 사식을 거부해 아버지로부터 “역시 내 아들”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아버지의 신임을 바탕으로 1998년 형인 정몽구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됐고, 금강산 관광을 주도하면서 유력한 후계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9년엔 반도체 빅딜로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정몽헌 회장의 전성기가 활짝 열리는 듯 했다.

 

70년대 말 현정은 회장과 연애 시절 사진() 1997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왼쪽에서 정몽헌, 현정은, 아들 영선, 둘째딸 영이, 큰딸 지이.()

2000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일행과 기념사진.

 

그러나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현대그룹 정몽구 회장은 공동회장인 동생 정몽헌 회장이 외국에 나가 있는 사이 현대증권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3 14일 이익치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보내고 대신 자기 사람인 노정익 현대캐피탈 부사장을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하려 했다. 이에 정몽헌 회장측이 다음 날 즉시 강력하게 반발했고 이익치 회장도 인사에 승복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반격은 324일 오후 2시 정몽헌 회장이 귀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현대 계동 사옥 12층 그의 집무실에 이익치 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등 측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불과 20여분간의 짧은 면담이 끝난 뒤 김재수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은 기자회견을 예고했고, 그 내용은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이 회장 인사를 원점으로 돌린 것은 물론 정몽구 회장을 그룹 공동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정몽구 회장은 다시 여기에 반발하여 3 26일 아버지의 서명을 들먹이며 공동회장에 복귀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러나 결국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나서 “현대경영자협의회 대표는 정몽헌 단독으로 한다”고 선언, 끝이 났다.

 

이후 정 회장은 2000 6월 현대아산 회장에 취임하면서 대북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2001년 정주영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형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그룹을, 동생 정몽준 회장은 중공업그룹을 이끌고 결국 현대를 떠나고 말았다. 형제들 사이의 반목과 분열로 현대그룹은 이때 위기를 맞았다. 주가는 폭락했고, 자금 유동성 문제도 심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룹이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했다.

 

 

2002 3, 미국 의회에서 대북 송금 문제가 처음 공개되었고, 월간조선 2002 5월호에 관련 내용이 실렸다. 그리고 9월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내용은 6.15 정상회담 직전 정상회담의 대가로 현대상선이 북한에 4억 달러를 비밀리에 송금했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03 2 14 "국민에 드리는 말씀" 방송에서 "현대의 대북송금 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치게 되어 참으로 죄송하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 해명했다.

"국민의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이미 북한 당국과 많은 접촉이 있던 현대 측의 협력을 받았다. 현대는 대북송금의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철도, 통신, 관광, 개성공단 등 7대 사업권을 얻었으며, 정부는 그것이 평화와 국가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튿날인 2 26일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한나라당과 자민련 의원만으로 열린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제안한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특검으로 밝혀진 사실은 현대가 '7대 경협사업' 독점권 대가로 4억 달러, 정부의 북한 지원금 1억 달러, 5억 달러를 북한에 제공하는 과정에서 현물 5천만 달러를 제외한 현금 45천만 달러를 송금하는 데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이 불법적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대북 송금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구마 줄기처럼 현대 비자금 사건이 터져 나왔다. 현대그룹에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받았다는 돈이 3000만 달러와 200억 원, 박지원이 받았다는 돈이 150억 원이다. 그 돈을 이들에게 건넸다는 사람이 김영완이다. 권노갑은 징역 5년을 선고 받아 실형을 살았고 박지원은 무죄 판결이 났다. 검찰은 3000만 달러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 200억 원에 대해서는 김영완이 단순 전달자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 하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김영완이 보관하고 있던 121억 원의 출처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사장은 정몽헌에게 150억 원을 받아 김영완을 통해 박지원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김영완은 "이 돈의 주인은 박지원이고 나는 보관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으나 박지원은 부인했다. 결국 지난 2월 검찰이 121억 원의 주인을 찾는다는 공고까지 냈지만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 돈은 국고로 환수됐다.

 

검찰은 이런 혐의를 잡고 정회장을 상대로 강도 높은 조사를 한 것이었다. 정몽헌 회장으로선 사면초가인 상황이었다. 그가 운명을 걸고 앞장섰던 대북사업이 북핵 위기 등으로 주춤하게 되면서 그의 사업 전반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았다. 금강산 등에 쏟아 부은 투자액에 발목이 잡히면서 현대아산, 현대상선의 경영 상태는 극히 악화된 상태였다. 게다가 새 정부는 정회장을 대북 창구로 활용할 의지가 없었다. 막대한 손해를 보면서 대북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자신이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치부되면서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되자 정회장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더욱이 걸핏하면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는 등 변덕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북한 또한 정회장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