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 금융실명제 발표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임시 국무회의를 마친 김영삼 대통령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발표했다.
금융실명제란 금융기관을 통한 예금 등 금융자산거래를 ‘실지명의’에 의하도록 「특별법」에 의하여 의무화하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구 등 서구에서는 계약 시 서명하는 관행에 의해 금융실명제가 정착되었으며, 스웨덴,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는 「세법」에 실명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1982년 금융실명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이래 실질적으로 시행되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고, 특별법(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해 금융거래의 실명화를 이루었다는 점으로 보아 척박한 정치·경제 환경 속에서 단행된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전에는 1961년에 제정된 「예금·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금융기관에 예입 또는 기탁된 예금, 적금 등에 관해서는 비밀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여 비실명거래가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2년 ‘이철희, 장영자 사건’을 계기로 사채 등 지하경제가 만연하고 가명, 차명 계좌를 허용했던 기존 금융경제질서에 변화가 요구되었다.
1982년 12월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주민등록표상 실지명의의 금융거래는 의무화되었으나, 전산화 등의 준비기간을 고려하여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령이 정하는 날 시행하는 것으로 유보함으로써 실질적인 금융실명화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사실상 전두환 정권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경우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히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또한 1988년 10월 정부는 「경제의 안정성장과 선진화합경제추진대책」을 통해 1991년 1월 1일 금융실명제를 전면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가, 이것 역시 무기한 유보하였다. 유보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정부는 「금융실명제 실시유보의 배경과 현재의 상황」이라는 당시 기록에서 “우리경제가 86∼88년 고도성장 뒤에 오는 순환적 경기조정과 구조적 어려움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1989년 이후 급격한 경기 둔화, 국제수지의 적자반전, 물가불안 등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되어,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경우 경제전반에 불확실성을 증폭시킴으로써 자금이 대규모로 금융시장을 이탈하여 부동산 투기의 확산, 기업자금조달의 애로 및 경제운용상의 혼란을 초래하고 가계와 기업의 저축 및 생산적인 투자의욕을 감퇴시키는 등 각 경제주체의 ‘경제하려는 의지’가 약화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1993년 정부는 다시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긴급명령을 단행하였다. 이것은 흐트러진 금융관행을 바로잡고 공평과세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써 경제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부의 의지표명이었다.
금융실명제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준비하는 실무진 전원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뒀다. 이어 "보안이 새어나가면, 실무진들은 전원 구속시킬 것"이라며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실명제를 준비하는 공무원 20명은 철저한 비밀 유지를 위해 두 달 간 집에도 가지 못하고 경기도 과천의 주공아파트에서 합숙을 해야 했다. 일부 공무원은 해외로 출장을 나갔다가 귀국 후 곧바로 합숙소로 갔고, 출국을 위해 공항에 갔다가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연행되듯 합숙소에 합류하기도 했다.
금융실명제를 발표하자 정치권과 재계는 발칵 뒤집혔다. 증시는 발표 직후 이틀 동안 8.2%나 폭락했다. 당시 이경식 경제부총리는 "초기에 성장률이 1~2%포인트 정도 떨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김 대통령은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라며 밀어 부쳤다. 증시는 단기간에 안정을 되찾았고, 한국 경제에 대한 대외신뢰도는 더욱 높아졌다. 정경유착의 고리였던 불법 정치자금이 크게 줄어들었고, 비실명계좌를 통한 탈세와 자금세탁도 어려워졌다. 검찰의 자금추적이 용이해지면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등 대형 비리사건이 잇따라 적발되기도 했다. 당시 동향보고 기록을 살펴보면, 긴급명령 시행 후 실명전환 의무기간 동안 금융거래자의 81.3%가 실명확인의 절차를 밟았고, 가명 또는 차명계좌의 6조 2,379억 원이 실명계좌로 전환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금융실명제로 갈 곳을 잃은 지하자금은 금과 부동산으로 몰렸다. 김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는 더욱 거세졌다. 1995년 1월에는 '부동산실명제' 도입을 발표해 차명 거래를 금지했다. 같은 해 7월1일부터 이듬해 6월30일까지 1년 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모든 부동산을 실명으로 등기하도록 했다. 부동산 탈세와 투기 방지를 막는 데 획기적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금융실명제 실시 당시 기사들에서는 예명을 쓰던 연예인이 금융실명제 때문에 본명이 드러나서 난감해지거나, 집주인이 전세금을 모두 현금으로 받으면서 수천만 원을 일일이 세느라 힘들었던 사연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이전에도 대부분의 일반 국민은 이미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금융실명제 실시 1년 후에 한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뒷돈 거래가 감소함으로써 소비자들의 현금 보유 성향이 다소 높아지고 내구재, 외식, 여행 등에 대한 지출이 다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실명계좌에 입금해 뒷돈 거래가 드러나느니 차라리 소비지출에 써 버리려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채 같은 사금융 시장이 위축되면서 서민들과 중소기업이 은행과 같은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금융거래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다양한 금융상품이 개발됨에 따라 우리나라 금융이 선진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금융실명제로 인해 금융계좌를 개설할 때 번거로운 실명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불편함이 늘어났다. 엄격한 실명확인 절차로 인해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나 유학생들이 국내에 계좌를 만들기가 더 번거로워진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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