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5일

황성신문 창간

산풀내음 2016. 8. 14. 23:37

1898 9 5,  황성신문 창간

 

국운이 다해가던 1898 9 5, 사장 남궁 억, 총무원 나수연 등이 국민지식의 계발과 외세침입에 대한 항쟁의 기치 아래 지금의 서울 광화문에서 황성신문을 창간하였다. 편집진으로는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 면면이 민족주의적 사관을 지닌 인사들로 구성했다.



남궁 억 선생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라고 하나 거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단 정도의 한문위주의 문장으로 제작되어 독립신문 이후 여러 신문들이 순한글로 제작되던 전통을 깨뜨려 한학 식자층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당시 독자들은 한글 전용의 민족지 ‘뎨국신문’을 ‘암()신문’, 한문을 섞어 쓰는 ‘황성신문’을 ‘수()신문’이라고 불렀다.

 

지면의 기사배치는 대한제국시대의 다른 신문들과 거의 마찬가지로 논설·별보(別報), 관보, 잡보(雜報), 외보, 광고 등으로 구성하였으며, 1899 11 13일자부터는 지면 크기를 확대하여 34.5×25.2㎝의 4 4단제를 채용하고 기서(寄書), 고사사조(故事詞藻), 습유란(拾遺欄: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 등을 신설하였다. 1900 1 5일자 신문부터는 영국 로이터통신과 계약을 체결하고 외신을 게재하는 ‘전보’ 기사란에 한성 루터 전특체(電特遞)’라고 부기하고 외국 뉴스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1904 6 17일 일본인이 한국에서의 황무지개척권을 주한 일본공사를 통하여 한국정부에 요구해오자,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이 이를 폭로하면서 유생이 중심이 되어 격렬하게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구국민중대회의 모임인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상세히 보도하여 배일(排日)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측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1904년 2월 24일 이 신문은 한일의정서의 조인 내용을 게재했다가 외부의 게재금지 명령으로 기사를 삭제 당하여 문제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인쇄함으로써 이른바 ‘벽돌신문’이 처음 나오게 되었다.


 

1905 11 20일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기사로 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직원이 체포되었다. 장지연은 이 논설을 통해 보호조약의 체결로 동양 3국의 평화를 깨뜨리게 될 것이며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은 개, 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질책했다. 또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임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이 날 신문은 평소보다 1만부를 더 인쇄해 서울 전역에 배포되었다이듬해 1 24일장지연이 석방되고 발행정지도 동시에 해제되었으나 장기정간으로 재정난이 악화되어 2 12일에야 겨우 속간할 수가 있었다.

 

이렇듯 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1910 8 29일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 (漢城新聞)으로 바뀌어 8 30일자부터 9 14(3470)까지 발행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하게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 4천 년의 강토와 5 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 원통한지고, !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 선생, 구한말기에 애국·계몽 운동에 엄청난 공적을 남겼으나 경술국치 이후 실의에 빠졌다. 한편 1914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논설 730여 편이 문제가 되어 친일 의혹 논란이 현재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