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9일

이란 `親팔레비` 쿠데타

산풀내음 2017. 7. 14. 17:41

19538 19,

이란 `親팔레비` 쿠데타

 

1908년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래, 이란 원유를 독점한 것은 영국 자본 ‘앵글로ㆍ이라니안 석유회사(AIOC, BP의 전신)’였다. 2차 대전 후 제3세계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가운데 이란에서도 석유산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국민적 감정을 타고 석유산업을 국유화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 모사데크 (Mohammad Mossadegh, 1882 ~ 1967). 그는 영국은 물론 소련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리버럴한 성향의 노() 정치가였다. 1951년 모사데크는 총리가 되어 AIOC를 국유화시켰다. 이후 근대화를 추진해 국왕의 전제적 권한을 제한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당시의 이란 왕은 팔레비였다.

 

Mohammad Mossadegh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던 영국이 이란석유 불매운동과 경제봉쇄조치로 이란 경제에 타격을 가하자 어느덧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 모사데크 목소리가 높아졌다. 팔레비 2세는 기회를 틈타 모사데크를 파면했으나 오히려 모사데크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힘에 밀려 로마로 쫓겨났다. 그러나 1953 819, 미국 CIA 지원을 받은 친() 팔레비의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함으로써 사태가 역전된다. 무사데크 체포와 함께 이란의 탈()제국주의 몸부림도 2년 만에 끝이 났다.

 

팔레비 2세는 1960년대부터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움직여, 반체제 운동을 단속하며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한편으로는 위에서 개혁을 도모하며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개발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팔레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얻은 외국 자본과,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한다. 국영기업 민영화, 노사간 이익 분배와 노동자 대우 향상,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팔레비 2세는 자신의 칭호를 '아리야의 영광'을 뜻하는 '아리야 메헤르'로 정하고 이란 민족 의식을 고취했다. 1967년부터는 군주의 칭호를 보다 더 높은 '샤한샤(샤 중의 샤, 왕 중 왕 즉 황제)'로 격상시켰다.

 

팔레비2(Muhammad Reza Shah Pahlavi)

 

1970년대에 들어, 오일 쇼크가 가라앉고 유가가 안정되자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겼으며, 경제 발전으로 빈부격차가 확대하자 이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결국 이슬람 원리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이 모여서 파업과 시위가 빈발했고 1979 1 16일 암으로 죽어가던 팔라비 2세는 치료를 핑계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