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9일

소련 공산당 보수파, 쿠데타 시도

산풀내음 2017. 7. 15.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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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산당 보수파, 쿠데타 시도

 

1991 819일 오전 6, 소련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긴급 방송이 흘러나왔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자칭한 혁명세력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발표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정규방송 대신 발레곡 ‘백조의 호수’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공산당 강경 보수파가 주도한 ‘8월 쿠데타’의 신호였다. 모스크바 시내에 공수부대와 전차 사단 등이 배치됐고 19일 오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됐다.

 

The leaders of the August Coup: from left, Soviet Interior Minister Boris Pugo, Soviet Vice President Gennady Yanayev, and Oleg Baklanov, the first Vice-President of the Soviet Defence Council. These men were members of the self-styled "committee for the state of emergency" which headed the coup against Soviet President Mikhail Gorbachev. Here, they gave a press conference on August 19, 1991 in Moscow.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3월 2 ~ )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발해온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소련 부통령 야나예프, 수상 발렌틴 파블로프,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 등 8인의 보수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1991 Coup against Mikhail Gorbachev)

 

쿠데타 세력은 하루 전인 18일 흑해연안 크림반도의 별장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야나예프 부통령에게 권력을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그들은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감금했다. 그리고 탱크부대를 모스크바에 진입시켰다. 쿠데타 세력은 고르바초프로부터 핵미사일 발사장치까지 빼앗았다.

 

고르바초프와 당시 감금되었던 별장

쿠데타 세력, 왼쪽에서부터 올레그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바체슬라프 게네랄로프 고르바초프의 별장 경호를 담당하던 KGB 소령,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다시 오른쪽부터 발레리 볼딘 고르바초프 비서실장, 발렌틴 바렌니코프 국방부 장관 대리, 올레그 셰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장,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의장,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비판하며 내세운 보수파의 쿠데타 목적은 소련의 빈곤을 구하는 새로운 지도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이었다. 진짜 의도는 25%나 감소되는 소련의 핵무기에 비해 15%밖에 감소되지 않는 미국의 핵무기 감소율을 규정한 미소전략무기제한협정(START)에 고르바초프가 서명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르바초프는 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모두에 과거 이상의 주권을 인정한 ‘신연방조약’에도 8 20일 서명할 예정이었다. 보수파는 공산당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이들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특히 신연방조약은 무너져 가는 소련을 형태만이라도 유지하려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고육지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보수파들은 기존 소련 체제 유지를 고수하며 신연방조약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이 모의를 통해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구성하고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수파의 성급한 거사는 곧바로 개혁 세력과 국민의 저항에 부닥쳤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1990년 독립을 선포한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파리에 머물고 있던 세계적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까지 쿠데타 소식을 듣고 급히 모스크바로 날아와 첼로 대신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손에 들고 의회 방어대에 가담했다.

 

모스크바 인근 별장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리고 지난 1991 7 10일 러시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보리스 옐친(1931 ~ 2007)도 이날 러시아 공화국 의회 의장 대행 루슬란 하스불라토프와 쿠데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특히 이날 오후 TV 방송을 타고 국내외로 퍼져나간 옐친 대통령의 탱크 위 연설은 쿠데타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옐친은 의회 의사당 건물을 봉쇄한 진압군의 탱크 위로 올라가 개혁에 맞서려는 쿠데타 세력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전 국민적 저항을 촉구했다. 옐친은 쿠데타군이 모스크바를 장악할 경우 임시정부를 만들어 대항할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한편 옐친의 봉기 촉구에 일부 군부대는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고 반기를 들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러시아공화국 의사당은 옐친을 지지하는 소련군과 시민들이 육탄벽을 쌓고 쿠데타군에 맞서서 저항하기 시작했고 공수부대도 옐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Over 50,000 people ignore a declared state of emergency and gather in front of the Russian parliament building in order to support Boris Yeltsin, on August 20, 1991. 

 

이와 함께 미국, 유럽 등 각국에서 쿠데타에 대해 비난 성명을 발표함과 동시에 각종 경제 원조 계획 등을 취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노동자 들의 파업은 더욱 확대되었고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쿠데타 지휘부는 20일을 기해 개혁 세력의 중심지인 의사당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의사당 주변에 모인 시위대 정찰에 나섰던 특수부대 지휘관이 무력 진압은 대규모 유혈 사태로 이어져 결국 쿠데타 실패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력히 만류했다. 쿠데타 세력은 진퇴양난의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다.

 

21일 새벽 쿠데타 군 장갑차가 시위대가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밀치고 의사당 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민이 희생되면서 시위대의 저항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시위 진압에 나선 특수부대도 속속 이탈하고 있었다. 결국 야조프 국방장관은 이날 모스크바에 진주한 모든 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렸고, 쿠데타 지도부는 대표단을 크림반도 별장으로 보내 고르바초프와 재협상을 시도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러나 이들과의 면담을 거부했고 뒤이어 복구된 통신선을 통해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모든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22일 크림반도로 찾아온 개혁파 지도부와 함께 모스크바로 귀환했고, 쿠데타 지도부는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내무장관 푸고는 체포에 앞서 권총으로 자살하는 길을 택했다. 개혁에 저항하던 보수파의 쿠데타 시도가 3일 천하로 끝나고 만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50시간 만에 연금에서 해방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와 크렘린에서 다시 집무를 시작했다. 권좌를 되찾은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즉각 공산당에 대한 대숙청에 들어갔다. 8명의 주요 쿠데타 인물 중에서 내무장관 푸고는 자살했고 나머지 일곱 명은 체포된 상태였다. 고르바초프가 복귀 이후에 두문불출하던 사이, 숙청을 선두 지휘한 것은 옐친이었다. 옐친은 군의 공산당 조직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세포조직을 모두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고르비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만나 신연방조약 조인문제 등을 논의하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재개했지만 이미 그는 완전히 실각한 거나 다름없었다.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대대적인 자치를 요구했고 발트3국과 몰다비아 등 6개 공화국은 아예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편 시민들은 경찰들이 구경만 하는 동안 KGB청사로 몰려가 KGB창시자 제르진스키 동상을 박살내고 소련기가 아닌 러시아기를 게양했다. 주요기관에선 옐친의 올라간 권위를 상징하듯이 소련기와 러시아 공화국 깃발이 동시에 나부꼈다. 옐친은 공식적으로 소련의 권력의 절반을 고르바초프로부터 넘겨받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할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A crowd watches the statue of KGB founder Dzerzhinsky being toppled in Lubyanskaya Square in Moscow, on August 22, 1991.


소련의 내각은 빠르게 옐친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KGB의장과 내무국방관에 모두가 옐친의 지지자 또는 핵심측근들이었다. 사실 이 자리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사람들을 임명해 놨었는데 옐친의 항의로 도로 다 물려야 했다. 공화국회의에 나온 고르바초프에게 옐친은 "어서 명단을 읽으시오."라고 큰소리를 치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사건이 발발하였고 이는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알려진 충격적 사건이었다.

 

August 23, 1991: Soviet President Mikhail Gorbachev with Russian President Boris Yeltsin in Parliament

이 사진을 보면 생각나는 말은 背恩忘德, 그래서 난 옐친을 좋아하지 않는다.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내에서 공산당의 활동 금지와 더불어 공화국 내의 소비에트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연방 해체에 박차를 가했다. 그 해 12 8일 소련에 속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주요 3국 지도자가 독립국가연합(CIS) 결성 협정에 서명하면서 1917년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출범했던 소련은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고르바초프는 그 해 12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국가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옐친이 신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을 이끄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