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9일

장면, 제2공화국 총리에 피선

산풀내음 2017. 7. 14. 17:43

19608 19,

장면, 2공화국 총리에 피선

 

장면 의원이 1960 8 19일 국회에서 찬성 117, 반대 17표로 국무총리에 피선되었고 8 23일 장면 내각이 공식 출범하면서 제2공화국의 시대가 열렸다.

 


윤보선 대통령(중간)과 장면 총리()

 

이승만의 하야로 구성된 허정 과도내각은 6 15일 내각제 개헌안 통과와 7 29일 민-참의원 선거를 실시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다. -참 양원은 8 12일 합동회의에서 민주당 구파 지도자 윤보선을 제2공화국 대통령에 선출했다. 윤대통령은 당초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했으나 김도연이 민의원 투표에서 부결되는 바람에 장면을 총리로 지명했다.

 

장면 내각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분단으로까지 이어진 민주당 신, 구파간의 갈등은 2공화국의 주요 과제라 할 수 있는 반민주 잔재 청산과 반부패 개혁정책 추진을 지연 또는 좌절시켰다. 게다가 교사들의 전국교원노조 결성, 김일성의 남북연합 제의, 육사 8기생들의 숙군 주장 등 국내외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장면내각

 

국민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져 결국 10 11일에는 4.19부상학생들이 의사당에 난입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1961년에 들어서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아 학생들의 남북협상론이 급물결을 타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장면 총리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성안하는 등 남북협상 바람을 잠재우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결국 516일 박정희 소장의 5.16군부쿠데타가 발발, 2공화국은 수립 9개월여 만에 종막을 고했다.

 

그러나 박 정권 당시 비난 일변도였던 정권이었던 것과는 달리 상당한 공도 있었다. 2공화국은 정치적으로 국민참정권 보장과 다원적 민주사회 확립을 도모했으며, 최초로 관료의 공채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관료의 전문화와 효율화를 꾀한 바 있다. 또한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해 장기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실천함으로써 국민소득의 증대와 국부(國富)의 증강을 도모하되, 이를 관 주도형이 아닌 민간 자율의 방식으로 실천하려 했다.

 

이승만 체제하의 반공주의적 무력통일론을 넘어서는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 기반 조성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선거를 통한 통일방식을 제기하는 등 합리적이면서도 국제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분단 해소 노력을 전개함으로써 진정한 국민국가 수립을 모색했다. 나아가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 때 왜곡된 한일관계 정상화를 시도하는 등 대화와 협력을 통해 외교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1961 5월 하야 성명을 발표하는 장면